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전환점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이기풍 목사입니다. 평양의 유명한 왈패이자 기독교 박해자였던 그는 회심 이후 한국인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명이 되었고, 낯선 섬 제주도로 건너가 헌신적인 선교 사역을 펼쳤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생애는 단순한 한 개인의 종교적 전향을 넘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격변기에 한국 자생 교회가 어떻게 성장하고 이웃에게 헌신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입니다. 그의 삶을 통해 한국 교회사 속 초기 선교의 실제 모습과 현대 신앙생활에 주는 교훈을 차분히 짚어봅니다.
청년기 방황과 극적인 회심의 배경
평양의 왈패 시절과 기독교인 핍박
이기풍은 1865년 평양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하며 자랐으나, 청년기에는 거친 성격으로 평양 일대에서 악명을 떨치던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자, 그는 서양 종교가 전통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생각하여 강한 반감을 품었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활동하던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턱에 상처를 입히는 등 서양 선교사와 초기 개신교 신자들을 앞장서서 방해하고 핍박했습니다. 평양 널다리골에 세워진 초기 예배 처소를 파괴하는 데 가담할 정도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원산에서의 회심과 평양신학교 입학
청일전쟁(1894~1895년)의 여파로 평양을 떠나 원산으로 피난을 갔던 이기풍은 그곳에서 심각한 내적 고뇌와 병마를 겪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환상을 보고 자신의 과거 행동을 깊이 뉘우치며, 스왈른(William L. Swallen, 소안론) 선교사를 찾아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이 핍박했던 선교사를 찾아가 세례를 받은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1903년 장로회 신학교(평양신학교)에 1기생으로 입학하여 정식 신학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은혜 속에서 학업을 마쳤습니다.
독노회 창립과 한국 최초 7인 목사 안수
1907년 독노회와 한국인 목사의 탄생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한국 장로교 최초의 노회인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국인 최초로 신학 교육을 마친 7명의 졸업생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기풍은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서경조와 함께 한국인 최초의 목사 7인 중 한 명으로 세워졌습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외국 선교사의 지도를 받던 수동적 단계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교단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자치 교회의 결단: 제주도 외지 선교사 파송
독노회는 창립되자마자 한국 교회가 복음을 받기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이에 따라 최초의 목사 7인 중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언어와 풍습이 다르고 배편조차 위험한 사실상의 외지(타문화권)였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파송은 한국 교회가 자국 내 소외된 지역을 향해 스스로 선교사를 보낸 첫 번째 공식 외지 선교 사역이었습니다.
제주 선교 사역과 겪었던 현실적 도전
낯선 환경, 토착 신앙과의 마찰
1908년 봄, 이기풍 목사는 험난한 항해 끝에 제주도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유배지라는 어두운 역사와 함께 무속 신앙과 토속 문화가 깊게 자리 잡고 있어 외지인과 외래 종교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높았습니다.
주민들은 이기풍 목사를 서양의 첩자로 의심하며 숙소조차 내어주지 않았고, 언어적 장벽과 심각한 식량난, 풍토병으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초기에는 돌팔매질과 냉대를 견디며 주막과 헛간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헌신적인 사역과 제주 교회의 태동
이기풍 목사는 주민들의 냉대 속에서도 환자를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인내의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물질적 지원과 기도로 동역한 부인 윤함애 사모의 헌신 역시 사역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의 진심 어린 섬김에 마음을 연 주민들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성안교회(현 제주성안교회)를 비롯해 조천, 모슬포, 금성, 한림 등 제주 각지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사역은 제주도 전역에 복음의 기반을 다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생애 후반부의 사역과 역사적 신앙 유산
도서 지역 복음화와 교단 사역
이기풍 목사는 제주 선교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도 안주하지 않고 육지와 여러 섬을 오가며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전남 광주, 순천, 여수, 벌교 등 호남 지역을 비롯해 여수 우학리교회 등 복음이 닿기 힘든 도서 지역을 찾아다녔습니다.
1921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한국 교회의 연합과 성숙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그는 명예로운 자리에 머물기보다 복음이 필요한 변방의 교회를 자원하여 섬기는 목회자의 본을 보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
일제강점기 말기,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교회를 탄압할 때 이기풍 목사는 끝까지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앙적 절개를 지켰습니다. 노령의 나이에도 타협하지 않고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1940년 여수경찰서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렀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42년 6월 20일 우학리교회 사택에서 숨을 거두며 신앙의 절개를 지킨 순교자로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기풍 목사의 삶이 오늘날 던지는 신앙적 질문
핍박자에서 헌신자로의 회심의 진정성
이기풍 목사의 생애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이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가치관의 근본적인 전환임을 보여줍니다. 과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핍박했던 진리를 위해 평생을 바친 태도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에게도 자신의 과거와 한계를 뛰어넘어 이웃과 세상을 향해 어떤 변화된 삶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안정을 넘어 변방으로 향하는 헌신의 가치
이기풍 목사는 최초의 7인 목사라는 안정된 지위에 머물지 않고, 모두가 기피하던 제주도와 외딴 섬으로 향했습니다. 중심이 아닌 변방, 편안함이 아닌 헌신의 자리를 선택했던 그의 발자취는 오늘날 개인의 안락과 성공을 우선시하는 현대 사회에 큰 교훈을 전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섬김과 희생에 있음을 역사적 실천으로 증명한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신앙의 이정표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이기풍 목사가 한국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1. 1907년 독노회 설립 당시 한국 장로교회가 자립적인 교단을 형성한 후, 공식적으로 타문화권에 준하는 지역이었던 제주도에 처음으로 파송한 한국인 목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 교회가 수혜자 입장에서 선교 주체로 전환되었음을 상징합니다.
Q2.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 초기 겪었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
A2. 척박한 자연환경과 식량난, 풍토병뿐만 아니라 육지 사람과 외래 종교에 대한 현지 주민들의 강한 배타성과 무속 신앙의 벽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숙소를 구하지 못해 노숙을 하거나 돌팔매를 맞을 정도로 극심한 배척을 받았습니다.
Q3. 이기풍 목사의 신사참배 거부와 순교는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나요?
A3. 일제강점기 말기 교단적 굴복 속에서도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유일신 신앙과 우상숭배 금지 원칙을 목숨 걸고 지켜낸 역사적 결단입니다. 노령의 나이에도 고문과 옥고를 견뎌내며 한국 교회의 신앙적 정통성과 자존을 지킨 순교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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