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에서 여성 교육과 의료 선교의 초석을 놓은 인물을 꼽을 때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 선교사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입니다.
그녀는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적이던 19세기 말 조선에 입국하여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하고, 여성을 위한 전문 의료기관인 보구여관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조선의 소외된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일깨워준 메리 스크랜턴의 생애와 선교 사역, 그리고 현대 신앙인들이 되새겨야 할 유산을 체계적으로 살펴봅니다.
메리 스크랜턴의 생애와 조선 선교의 시작
메리 스크랜턴은 젊은 시절이 아닌 50대의 나이에 선교사로 부름을 받아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늦은 나이에 결단한 헌신과 입국 배경
메리 스크랜턴은 1832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이 남편과 사별한 후 외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을 의사로 키워냈으며, 미국 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WFMS) 활동에 깊이 참여했습니다.
1884년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이 미 감리회 의료 선교사로 임명되자, 메리 스크랜턴 역시 조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초대 여성 선교사로 자원했습니다.
그녀는 1885년 5월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정동에 정착했습니다.
당시 5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와 낯선 문화적 장벽,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조선 여성들을 향한 헌신을 흔들림 없이 시작했습니다.
유교적 장벽 속에서 마주한 초기 선교의 도전
19세기 말 조선 사회는 유교적 남녀유별 사상이 엄격하여 여성이 외인 남성과 대면하거나 교육을 받는 일이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과 ‘서양인이 아이들을 유괴한다’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가 돌던 시기였기에 여성들에게 다가가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메리 스크랜턴은 이러한 편견과 의심을 신뢰와 인내로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강압적인 선교 방식을 지양하고, 조선 여성들의 생활 방식을 존중하며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사역을 전개했습니다.
이화학당 설립과 전인적 여성 교육 사역
메리 스크랜턴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은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의 설립입니다.
이화학당의 시작과 교육 철학
1886년 5월, 메리 스크랜턴은 한 명의 학생(김부인)으로 여성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갈 곳 없는 어린이들과 가난한 집안의 여아들이 입학하면서 학교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1887년 고종 황제는 이 학교의 가치를 인정하여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우라’는 뜻을 담은 ‘이화학당’이라는 현판을 하사했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의 교육 목표는 단순히 서양식 지식을 주입하거나 한국인을 서양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우리의 목표는 한국 여성들을 미국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더 훌륭하게 만들 더 나은 한국인 여성을 기르는 데 있다”라는 분명한 철학을 밝혔습니다.
한글 교육과 여성의 자립 역량 강화
이화학당에서는 기독교 신앙 교육과 함께 한글, 영어, 산술, 과학, 가사 등 실질적인 근대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양반 계층에서도 천대받던 한글을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여 가르쳤으며, 이를 통해 여성들이 글을 읽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았습니다.
이러한 교육은 이름조차 없던 조선 여성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인격체로서의 권리와 사회적 책임을 가르치는 근대 여성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화학당을 통해 배출된 인재들은 훗날 교육자, 독립운동가, 의료인 등으로 성장하여 한국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보구여관 설립과 순회 전도 사역
메리 스크랜턴은 교육뿐만 아니라 의료와 지역 공동체 돌봄을 통한 전인적 사역을 펼쳤습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 ‘보구여관’ 태동 지원
남녀가 유별했던 당시 문화로 인해 조선 여성들은 몸이 아파도 남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메리 스크랜턴은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미국 선교 본부에 여성 의료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 1887년 여의사 메타 하워드(Meta Howard)가 입국하여 정동에 여성 전용 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개원했습니다.
보구여관은 고종 황후(명성황후)가 하사한 이름으로, 소외된 여성들에게 전문적인 치료를 제공하고 조선인 간호사를 양성하는 산실이 되었습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병원 운영을 적극 지원하며 몸과 영혼을 함께 돌보는 전인 치유 사역을 이어갔습니다.
지방 순회 전도와 ‘대부인(Great Lady)’으로 불린 헌신
메리 스크랜턴은 한양에만 머무르지 않고 경기도, 충청도 등 전국 각지의 농촌과 마을을 직접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마와 나귀를 타고 험한 길을 다니며 가난한 여성들을 만나 위로하고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인자하고 헌신적인 그녀의 모습을 보며 존경의 마음을 담아 ‘대부인(大夫人)’이라 불렀습니다.
그녀는 현지 여성 지도자들을 훈련하여 ‘전도부인(Bible Woman)’으로 세웠고, 이들은 한국 교회가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메리 스크랜턴이 남긴 신앙적 유산과 현대적 교훈
1909년 10월 8일 메리 스크랜턴은 77세를 일기로 서울 정동 자택에서 소천하였으며, 현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향한 성육신적 섬김
메리 스크랜턴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사랑을 삶으로 증명한 모범이었습니다.
자신의 문화적 우월성을 내세우지 않고, 조선이라는 시대적·문화적 배경 속으로 깊이 들어가 가장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섬길 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분명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나이와 한계를 뛰어넘는 소명에의 순종
인생의 후반부라 할 수 있는 50대에 새로운 사명을 받아들인 스크랜턴의 결단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자신의 안락한 노후 대신 미지의 땅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했던 그녀의 삶은, 소명이 나이나 환경의 제약을 받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녀가 뿌린 복음과 교육의 씨앗은 오늘날 한국 사회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풍성한 열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메리 스크랜턴과 윌리엄 스크랜턴은 어떤 관계인가요?
A1. 두 사람은 모자(母子) 관계입니다.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턴은 여성 교육 선교사로, 아들인 윌리엄 스크랜턴은 의사로서 의료 선교사로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초기 정동 일대를 중심으로 교육과 의료 사역을 동역했습니다.
Q2. 이화학당 설립 당시 한국 사회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A2. 초기에는 서양인에 대한 불신과 유교적 남녀유별 사상으로 인해 자녀를 입학시키기를 극히 꺼렸습니다. 그러나 스크랜턴 선교사의 헌신적인 돌봄과 차별 없는 교육이 알려지면서 점차 신뢰를 얻었고, 고종 황제가 공식 교명을 하사하며 국가적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Q3. 메리 스크랜턴이 묻힌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은 어떤 곳인가요?
A3.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안장된 역사적 장소입니다.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를 비롯하여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 한국 근대화와 복음화에 기여한 선교사들의 묘역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메리스크랜턴 #이화학당 #보구여관 #한국교회사 #기독교선교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윌리엄스크랜턴 #근대여성교육 #정동교회 #감리교선교사 #조선선교 #기독교역사 #전도부인 #여성선교사 #기독교인물 #한국기독교역사 #선교역사 #복음전파 #기독교교육 #신앙유산
본 포스팅은 네이버 쇼핑커넥트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