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회사에서 영성 신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인물은 12세기 시토회 수도사였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De diligendo Deo)는 “우리는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는 고전입니다.
이 책은 단순한 감정적 열정을 권면하는 것을 넘어, 타락한 인간의 자기애가 거룩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체계적인 영적 발달 단계로 설명합니다.
베르나르가 제시하는 사랑의 이유와 본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와 측정할 수 없는 척도
베르나르는 책의 서두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 생명과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 자체가 곧 사랑의 이유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과 정도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한계나 계산이 있을 수 없으며, 끝없이 사랑하는 것 자체가 올바른 척도라는 설명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물질이나 피조 세계의 만족으로는 영원히 채워질 수 없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유한한 세상 것에 머무르지 않고 무한한 창조주를 향할 때만 영혼의 참된 안식과 회복이 시작됩니다.
창조의 은혜와 구속의 은혜가 지닌 깊이
베르나르는 신앙인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은혜를 크게 창조의 은혜와 구속의 은혜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창조의 은혜는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생명, 이성, 자유의지와 같은 일반적인 선물을 의미합니다.
반면 구속의 은혜는 십자가의 수난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주어진 구원의 선물입니다. 베르나르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으나, 인간을 다시 구원하시는 과정에서는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감당하셨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러한 깊은 은혜를 묵상할 때, 인간의 마음 안에서는 의무감을 넘어선 자발적인 사랑과 깊은 감사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사랑의 4가지 발전 단계와 영적 여정
1단계와 2단계: 자기애에서 시작하여 유익을 구하는 사랑
사랑의 첫 단계는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기 자신을 가장 아끼고 보존하려는 자기중심적 사랑에 갇혀 있습니다. 베르나르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본성의 출발점이지만, 머물러서는 안 될 상태라고 지적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은 곤경, 고통, 결핍을 겪으면서 자신의 힘만으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을 찾는 동기는 여전히 자신의 안위, 기도 응답, 현실적 필요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그분의 신실한 응답을 경험하는 이 과정 역시 영적 성숙을 위해 거쳐야 할 필수 통로로 인정합니다.
3단계와 4단계: 하나님 그 자체를 사랑하는 단계와 완전한 합일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지속적으로 은혜를 맛본 영혼은 점차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 자체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에 눈을 뜹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현실적 보상이나 이익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극히 선하시고 사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게 됩니다. 참된 의미의 영적 성숙이 비로소 여기서 꽃을 피웁니다.
네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는 가장 높은 영적 경지로, 자기 자신의 존재 목적조차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과 뜻에 일치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베르나르는 4단계의 상태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지상 삶에서는 완전히 지속되기 어렵다고 설명합니다. 지상에서는 순간적인 은혜의 빛 가운데서 희미하게 경험하며, 영원한 본향에서 온전히 누리게 될 종말론적 소망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적 성숙을 위한 단계별 실천 순서
일상에서 적용하는 내면 점검과 전진의 흐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의 가르침을 신앙생활에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직한 자기 성찰과 질서 있는 영적 훈련이 요구됩니다.
- 자신의 현재 영적 동기를 객관적으로 분별합니다.
- 결핍을 가지고 나아오는 2단계의 기도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히 간구합니다.
- 응답 뒤에 계신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과 속성을 묵상하는 훈련으로 전환합니다.
- 나의 편의와 유익보다 하나님의 뜻과 통치를 우선순위에 두는 헌신을 연습합니다.
기도할 때 단순히 필요한 목록만을 나열하기보다, 오늘 하루 마주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곱씹는 묵상 시간을 떼어두는 것이 실질적인 도움이 됩니다.
신앙 서적이나 성경을 읽을 때도 지식의 습득을 넘어 마음이 창조주의 선하심에 감화되도록 머무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왜곡된 감정주의와 자기만족을 피하는 분별 기준
베르나르의 영성을 적용할 때 주의해야 할 중요한 예외는 사랑을 일시적인 ‘감정적 도취’나 ‘신비적 흥분’과 동일시하는 오류입니다.
베르나르가 속했던 시토회는 고요한 기도와 노동, 그리고 계명에 대한 충직한 순종을 바탕으로 영성을 길러갔습니다. 삶의 순종과 이웃을 향한 구체적 섬김이 동반되지 않는 영적 감정은 참된 사랑이 아닌 왜곡된 자기만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자신의 영적 상태를 다른 성도들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느끼거나, 반대로 높은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여 쉽게 낙심하는 태도 역시 경계해야 합니다.
사랑의 성장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성취하는 공로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 안에서 시간과 훈련을 통해 빚어지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하여》에서 말하는 사랑의 4단계는 순서대로만 진행되나요?
A1. 영적 성숙의 일반적인 발달 순서를 보여주지만, 기계적으로 한 단계씩 완전히 끝내고 넘어가는 개념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삶의 형편이나 위기 상황에 따라 2단계의 간절한 도움을 구하다가도, 깊은 예배 가운데 3단계의 순수한 찬양으로 나아가며 오갈 수 있습니다.
Q2. 2단계 사랑처럼 나 자신의 필요나 복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잘못된 신앙인가요?
A2. 결코 정죄받을 잘못된 신앙이 아닙니다. 베르나르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먼저 구하는 것을 성숙의 필수적인 출발점으로 인정하며, 그 응답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 그 자체를 사랑하는 자리로 자라가도록 권면합니다.
Q3. 기독교 고전인 이 책을 현대 평신도가 읽을 때 가장 먼저 집중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요?
A3. 수도원적 금욕 생활을 문자 그대로 흉내 내려 하기보다는, ‘내 신앙의 동기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를 살피는 통찰에 주목해야 합니다. 종교적 행위 자체보다 하나님을 향한 내면의 사랑과 중심을 회복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유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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