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나치당)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독일 개신교회는 교회사 역사상 가장 심각한 신학적·윤리적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교회 내부까지 침투하여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려 했던 암흑기 속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주님이심을 선언하며 결집한 신앙 운동이 바로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입니다.
오늘날 교회사와 복음주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고백교회의 형성과 그들의 저항은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국가 권력이 절대화될 때 성도는 신앙의 본질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 그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판단 기준, 핵심 인물들의 삶과 신앙을 차분히 살펴봅니다.
1. 나치 독일에서 고백교회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
고백교회는 단순한 정치적 반체제 집단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학과 직제가 나치즘에 종속되는 것에 반대하며 일어난 신앙 수호 운동이었습니다.
국가교회의 왜곡과 ‘독일 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en)’의 등장
1933년 1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직후, 나치는 독일 전역의 28개 개신교 주교회를 하나로 통합하여 통제하려는 ‘제국교회(Reichskirche)’ 구상을 추진했습니다. 이때 나치즘의 혈통주의와 인종주의를 기독교 신앙과 결합하려 했던 친나치 성향의 기독교인 분파가 바로 ‘독일 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en)’입니다.
이들은 성경과 전통적인 교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 구약성경의 배척: 유대 민족의 역사와 율법이 담긴 구약성경을 배척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이 아닌 아리아인의 영웅적 지도자로 왜곡했습니다.
- 아리아 조항(Arierparagraph)의 교회 도입: 국가 공무원법에 적용되던 아리아인 순혈주의 법률 조항을 교회법에도 도입하여, 유대인 혈통을 가진 목회자를 직위에서 해임하고 유대계 그리스도인의 예배 참석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 히틀러 숭배와 신학화: 히틀러를 하나님께서 독일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특별한 구원자로 칭송하며, 성경의 계시 외에 ‘민족과 피’를 또 다른 하나님의 창조 질서이자 계시로 둔갑시켰습니다.
목사긴급동맹(Pfarrernotbund)과 바르멘 신학선언
이러한 국가주의적 신앙 왜곡과 교회 침탈에 맞서 마르틴 니묄러 목사를 중심으로 1933년 9월 ‘목사긴급동맹(Pfarrernotbund)’이 결성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목회자가 가입한 이 동맹은 국가 권력의 교회 간섭을 거부하고, 성경과 종교개혁 신앙고백에 충실할 것을 서약했습니다.
이 저항 운동은 1934년 5월 부퍼탈 바르멘(Barmen)에서 열린 제1차 전국고백대회로 확장되었으며, 이곳에서 역사적인 ‘바르멘 신학선언(Barmer Theologische Erklärung)’이 채택되었습니다. 카를 바르트(Karl Barth)가 기초한 이 선언문은 고백교회의 신학적 주춧돌이 되었으며, 교회는 국가 권력이나 시대의 이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순종해야 함을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2. 고백교회를 이끈 주요 인물과 생애
고백교회의 역사는 진리 앞에서 타협하지 않고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결단을 통해 구체화되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디트리히 본회퍼는 당대 루터교회의 안일한 태도를 통렬히 비판하며 참된 제자도를 실천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였습니다.
- 값싼 은혜에 대한 경고: 본회퍼는 회개와 순종, 십자가의 결단이 빠진 채 위로와 사죄만을 구하는 종교적 태도를 ‘값싼 은혜’라고 비판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된 순종인 ‘값비싼 은혜’를 강조했습니다.
- 지하 신학교(핑켄발데) 운영: 나치 정권이 공인 신학교를 장악하자, 고백교회의 젊은 목회 후보생들을 양성하기 위해 핑켄발데(Finkenwalde)에서 비합법적인 공동생활 신학교를 이끌었습니다. 이곳에서의 훈련과 영적 교제는 그의 저서 『신도의 공동생활』과 『나를 따르라』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 고난받는 이들을 위한 행동: 본회퍼는 교회가 단순히 폭정의 희생자를 돌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달리는 수레바퀴의 바퀴살 사이에 몸을 던져 바퀴 자체를 멈추게 해야 한다’고 선언하며 유대인 구출 및 저항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결국 체포되어 종전을 불과 한 달 앞둔 1945년 4월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순교했습니다.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1892–1984)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잠수함(U보트) 함장이었던 마르틴 니묄러는 종전 후 신학을 공부하고 베를린-달렘 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했습니다.
- 초기 입장과 신학적 각성: 초기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에 실망하여 민족주의적 기대감을 품기도 했으나, 히틀러의 본질과 ‘독일 그리스도인’의 이단적 성격을 직시한 뒤 가장 단호한 반대자로 돌아섰습니다.
- 목사긴급동맹 창설: 1933년 9월 동료 목회자들과 함께 목사긴급동맹을 조직하여 아리아 조항에 정면으로 저항했습니다.
- 수용소 수감과 회개: 1937년 히틀러의 직접 명령으로 체포되어 작센하우젠과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8년간 수감 생활을 견뎠습니다. 전후에는 독일 교회의 집단적 침묵과 책임을 통회하는 ‘슈투트가르트 죄책고백(1945)’을 이끌어내는 데 앞장섰습니다.
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스위스 출신의 개혁주의 신학자로, 당시 독일 본(Bonn) 대학교의 신학 교수였습니다.

- 바르멘 선언의 신학적 기초 확립: 1934년 바르멘 신학선언의 초안을 작성하여, 자연이나 민족, 역사가 아닌 오직 성경에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체계적으로 변증했습니다.
- 히틀러 충성 맹세 거부: 공무원 신분으로서 히틀러 개인에게 무조건 복종하겠다는 서약을 거부한 끝에 1935년 교수직에서 해임되었고, 스위스 바젤로 추방된 뒤에도 저술과 강연을 통해 고백교회를 신학적으로 계속 지원했습니다.
3. 고백교회의 신앙적 판단 기준과 역사적 실천 단계
고백교회의 활동은 감정적이거나 정치적인 선동이 아니라, 철저한 신학적 분별과 체계적인 단계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성경적 분별과 실천은 어떠한 과정을 거쳤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신앙적 분별을 위한 핵심 판단 기준
고백교회 지도자들은 국가 권력의 요구를 평가할 때 명확한 성경적 원칙을 적용했습니다.
- 기독론적 유일성(Solus Christus): 교회는 세상의 통치자나 이념을 또 다른 구원자나 계시의 통로로 인정할 수 없으며, 모든 권위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복종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 성경의 온전성(Sola Scriptura): 인종주의나 정치적 편의에 따라 성경의 특정 부분(구약성경 등)을 임의로 삭제하거나 훼손할 수 없다는 기준입니다.
- 교회의 보편성과 일치성(Una Sancta Ecclesia):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서는 인종, 민족, 혈통에 따른 차별이 존재할 수 없으며, 세례받은 모든 성도는 차별 없이 교회의 일원이라는 원칙입니다.
고백교회의 저항과 연대 실행 순서
고백교회의 신앙 운동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발전하고 실행되었습니다.
- 상황 인식 및 신학적 경고 (1933년 초): 나치 정권의 ‘독일 그리스도인’ 장악 음모와 반유대주의 법률 도입에 대해 목회자 설교와 신학적 비판 문건을 통해 교인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렸습니다.
- 연대 조직 구성 (1933년 9월): 위협받는 유대계 목회자와 신앙 양심을 지키려는 동료들을 법적·재정적·영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목사긴급동맹’이라는 실제적인 연대 망을 구축했습니다.
- 신앙고백 선포 및 신학적 결집 (1934년 5월): 루터교와 개혁교회의 대표자들이 모여 ‘바르멘 신학선언’을 공동으로 채택함으로써 교회의 진정한 기초가 무엇인지를 공식 천명했습니다.
- 자체적인 교회 행정 및 양성 체계 구축 (1934년 가을 이후): 나치 통제하의 제국교회와 공식적으로 결별하고, 자체 총회를 열어 독자적인 목사 안수와 핑켄발데 지하 신학교 운영 등 교회 본연의 기능을 독립적으로 유지했습니다.
- 구체적 실천과 고난 감당 (1937년~1945년): 게슈타포의 감시, 체포, 강제 해산, 처형 속에서도 비밀 예배를 유지하고 유대인 탈출을 돕는 등 실천적 증언을 이어가며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주의해야 할 역사적 오해와 예외적 한계
고백교회의 헌신은 높이 평가받아야 하지만, 교회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한계와 예외도 함께 균형 있게 인식해야 합니다.
- 전체 교회의 참여가 아니었음: 고백교회는 독일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다수파가 아니었습니다. 대다수의 교인은 침묵하거나 순응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적극적으로 저항한 목회자와 성도는 소수였습니다.
- 초기 저항의 성격과 범위: 고백교회의 초기 목적은 ‘교회의 교리와 행정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정권 자체를 전복하려 하거나 나치의 잔혹한 인종 학살(홀로코스트) 전체에 대해 조직적으로 전면 저항한 것은 아니었으며, 본회퍼처럼 보편적 인권과 국가적 폭력 자체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은 고백교회 내부에서도 소수에 해당했습니다.
4. 현대 성도와 교회를 위한 신앙 점검표
고백교회의 투쟁은 과거의 일로 끝나지 않고, 물질주의와 상대주의, 각종 이념이 범람하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집니다.
- [ ] 유일한 권위의 인정: 나의 삶과 신앙의 최고 권위가 세상의 여론이나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고 있는가?
- [ ] 참된 은혜와 제자도: 회개와 삶의 변화 없이 종교적 위안만을 추구하는 ‘값싼 은혜’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
- [ ] 교회의 거룩성과 보편성: 교회 공동체 안에 사회적 지위, 경제적 형편, 출신 배경에 따른 분리와 차별이 자리 잡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는가?
- [ ] 고난받는 이웃을 향한 책임: 억압받고 소외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복음의 사랑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가?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고백교회는 정치 정당이나 무장 혁명 단체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백교회의 본질은 ‘신앙고백 공동체’였습니다.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적 사상(아리아 조항, 히틀러 숭배)을 배격하고 성경과 정통 교회의 신앙을 수호하려는 목적으로 출발했습니다. 본회퍼를 비롯한 일부 인물이 정권 저항 운동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으나, 고백교회 운동 자체의 중심은 예배, 설교, 성례, 그리고 바른 교회의 직제를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Q2. ‘바르멘 신학선언’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요?
바르멘 신학선언은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6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핵심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가 듣고 신뢰하며 순종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교회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으며, 교회 역시 국가의 정치적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복음주의적 독립성을 분명히 했습니다.
Q3. ‘독일 그리스도인’과 ‘고백교회’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이었나요?
가장 큰 차이는 ‘권위의 원천’에 있었습니다. ‘독일 그리스도인’은 성경뿐만 아니라 민족과 총통(히틀러)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하나님의 계시와 동등한 권위로 보았습니다. 반면 고백교회는 어떠한 시대적 가치나 국가 권력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위에 설 수 없음을 천명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