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조선의 개항기는 사회·정치적 격변기이자 근대 문물이 유입되던 전환기였습니다. 당시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교육과 복음 전파의 초석을 놓은 인물이 바로 미국 감리회(미감리회,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소속 선교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입니다.
아펜젤러는 단순한 종교적 선교 활동에 머물지 않고, 신학문 교육과 성경 번역, 문서 선교를 아우르며 한국 근대 교육의 기틀이 된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웠습니다.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아펜젤러 선교사의 생애와 배재학당 설립의 구체적 과정, 그리고 이 사건이 한국 교회사와 교육사에 지니는 신앙적·역사적 의의를 체계적으로 살펴봅니다.
1. 헨리 아펜젤러의 성장 배경과 한국 선교사 파견
헨리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서더튼(Souderton)의 독실한 독일계 개혁교회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신앙 교육 속에서 성경을 가까이하며 자란 그는 청년기에 중요한 신앙적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1-1. 회심과 신학 훈련 과정
1876년 장로교 계열 프랭클린 앤 마샬 대학(Franklin and Marshall College)에 입학한 아펜젤러는 재학 중 복음주의적 회심을 경험하고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습니다. 졸업 후 뉴저지주 매디슨에 위치한 드루 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 진학하여 개혁 복음주의적 신학과 전도 훈련을 체계적으로 이수했습니다.
신학교 시절 그는 전 세계 미전도 지역을 향한 선교 열정을 품고 있었으며, 특히 문호가 열리기 시작한 동아시아 선교에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당시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는 조선(한국) 선교 개척을 추진하고 있었고, 아펜젤러는 1884년 12월 한국 파견 선교사로 정식 임명을 받았습니다.
1-2. 조선 입국과 초기 정착의 난관
1885년 1월, 아펜젤러는 아내 엘라 닷지(Ella Dodge Appenzeller)와 함께 미국을 출발하여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함께 제물포(인천) 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정세는 1884년 말 발생한 갑신정변의 여파로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미국 공사관은 안전 문제를 이유로 기혼 여성과 선교사들의 서울 진입을 제한했습니다. 이에 따라 아펜젤러 부부는 잠시 일본으로 건너가 정세를 지켜보며 한국어 학습과 기초 자료 수집에 전념한 뒤, 정국이 안정된 같은 해 7월 19일 서울(한양)에 정식으로 입성했습니다.
2. 배재학당 설립 과정과 근대 교육의 실행 체계
조선 정부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으나,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기독교 포교의 자유를 명문화하여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법적·제도적 환경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직접적인 대중 전도를 행하는 데는 뚜렷한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2-1. 설립 배경과 법적·사회적 판단 기준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접촉점이자 조선 사회의 근대화를 돕기 위한 방법으로 ‘의료’와 ‘교육’ 사역을 선택했습니다. 고종 황제와 조선 조정 역시 서구의 과학 기술과 외국어(영어)를 습득할 수 있는 근대식 교육 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아펜젤러는 서울 정동에 부지를 확보하고, 직접적인 교리 주입보다는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근대 학교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선교 사역을 전개할 때 다음과 같은 원칙과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 조선 국법과 외교 협정 준수: 금교령이 완전히 해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한 공개 포교를 피하고 합법적인 교육 사업을 통해 신뢰를 형성했습니다.
- 실용 교육과 전인 교육의 결합: 단순한 어학 교육에 그치지 않고, 서양 과학·역사·지리 및 노작(勞作) 교육을 병행하여 자립심을 길렀습니다.
- 인재의 신분적 평등 추구: 양반 계층뿐만 아니라 중인, 평민 출신 청년들에게도 균등한 학습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2-2. 단계별 설립 및 발전 과정
배재학당은 개인적인 사설 학당에서 출발하여 조선 정부의 공식 승인을 받는 정규 교육 기관으로 발전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행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사설 수업 시작 (1885년 8월): 이겸라, 고영필 등 2명의 학생에게 방 한 칸을 교실로 삼아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 선교부 승인 및 부지 확충 (1885년 말~1886년 초): 학생 수가 점차 늘어나자 미감리회 선교 본부의 지원을 받아 정동 부지를 확장하고 본격적인 학교 체제를 구비했습니다.
- 고종의 현판 하사 (1886년 6월 8일): 조선 정부는 이 학교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고종 황제의 명으로 ‘배재학당(培材學堂, 유용한 인재를 기르는 집)’이라는 학교 이름과 현판을 하사했습니다. 이는 조선 정부가 공인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서양 사립학교로 자리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 근대식 벽돌 교사 신축 (1887년): 늘어나는 학생을 수용하기 위해 한국 최초의 서양식 르네상스 양식 벽돌 교사를 완공하여 쾌적한 교육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 협성회 조직과 학생 운동 (1896년): 서재필, 윤치호 등의 지도로 학당 내에 토론회이자 자치 기구인 ‘협성회(協成會)’를 창립하여 민주주의 의식과 자주독립 정신을 함양했습니다.
3. 배재학당의 교육 이념과 역사적 영향

배재학당은 단순한 지식 전달 기관이 아니라, 성경적 인간관과 봉사 정신에 기초한 학문의 터전이었습니다.
3-1. ‘욕위대자 당위인역’의 성경적 실천
배재학당의 당훈은 마태복음 20장 26절~27절의 예수 그리스도 말씀에 기초한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欲爲大者 當爲人役)”였습니다.
유교적 신분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서 지도자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은 매우 혁명적인 전환이었습니다. 아펜젤러는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를 벌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학당 내에 인쇄소(삼문출판사)를 운영하는 노작 교육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학생들은 활판 인쇄 기술을 배우며 근로의 가치를 체득했고, 이곳에서 한글 성경과 독립신문 등이 인쇄되어 한국 근대 문화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3-2. 배재학당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점검
배재학당의 설립과 운영은 한국 근대사와 교회사 전반에 걸쳐 다각적인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 독립운동가 및 근대 지도자 배출: 이승만, 서재필, 주시경, 신흥우, 김진호 등 근대사 및 한글 운동, 독립운동의 중심인물들이 배재학당을 거쳐 성장했습니다.
- 근대적 민주 시민 의식 고취: 학당 내 토론회와 연설회를 통해 자유권, 평등사상, 자주독립 의식이 확산되었습니다.
- 성경 번역과 한국 교회 개척: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운영과 병행하여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고 성서번역위원회 회원으로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전·후서 등의 한글 번역 작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4. 선교사의 최후와 사역 평가 시 주의할 역사적 예외
1902년 6월, 아펜젤러 선교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여객선 ‘구마가와마루(Kumagawa Maru)’ 호를 타고 항해하던 중, 군산 앞바다(어청도 인근)에서 다른 선박과의 충돌 사고로 조난당했습니다. 그는 배가 침몰하는 위급한 순간에도 동행하던 한국인 조수와 어린 여학생을 구조하려 선실로 내려갔다가 44세의 나이로 순직했습니다.
아펜젤러의 생애와 배재학당을 평가할 때는 역사적 사실과 신학적 관점을 균형 있게 유지해야 하며, 다음과 같은 오해나 과도한 확장을 주의해야 합니다.
- 단독 설립이 아닌 협력 사역: 배재학당의 설립은 아펜젤러 개인의 단독 성과가 아니라, 미감리회 선교부의 정책, 김옥균·서재필 등 개화파 인물들의 간접적 조력, 고종 황제의 윤허와 후원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결과였습니다.
- 정치적 투쟁 기관으로의 단순 환원 경계: 훗날 배재학당 출신들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아펜젤러의 본래 설립 목적은 정치적 결사체 조직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전인적 기독교 인재 양성’이었습니다.
- 금교령 시기의 현실적 선교 방식 이해: 초기 선교사들이 곧바로 복음을 외치지 않고 학교와 병원을 먼저 세운 것은 복음 전파를 회피한 것이 아니라, 현지 법규를 존중하면서 문화적·제도적 장벽을 합법적으로 극복하려 했던 신중한 선교 전략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아펜젤러 선교사는 장로교 선교사인가요, 감리교 선교사인가요?
헨리 아펜젤러는 미국 감리회(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소속 선교사입니다. 그는 대학 시절 장로교 계열 학교를 다녔으나 복음주의 회심 이후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으며, 드루 신학교 졸업 후 미감리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내한했습니다. 같은 배를 타고 입국한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가 미국 북장로회 소속이었습니다.
Q2.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은 아펜젤러가 직접 지었나요?
아닙니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명칭과 간판은 1886년 6월 8일 고종 황제가 직접 지어 하사(사액)한 것입니다. ‘유용한 인재를 기르는 배움터’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이는 조선 왕실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임을 나타냅니다.
Q3. 배재학당 설립 당시 학생들에게 성경을 필수적으로 가르쳤나요?
초기에는 조선 정부의 금교 조치가 완전히 해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규 교과목으로 성경을 강제하지 않고 영어, 산술, 서양 과학 등 근대 학문을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매일 아침 예배(채플)를 자율적으로 운영하며 기독교적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전달했고, 신앙의 자유가 점차 보장됨에 따라 성경 교육이 정규 과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생애와 배재학당의 역사는 어두웠던 개항기 한국 사회에 교육을 통한 개혁과 섬김의 복음을 심어준 중요한 발자취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신앙이 삶과 격리된 이론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헌신으로 나타나야 함을 명확히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