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개신교 수용의 개척자 이수정의 생애와 한글 성경 번역 역사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복음의 수용 과정은 세계 선교 역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궤적을 지닙니다. 통상적으로 외국의 선교사가 미지의 지역에 먼저 들어가 언어를 익히고 성경을 번역하여 전도하는 일반적인 선교 방식과 달리, 한국 개신교는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이미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례 없는 역사의 한가운데에 실학적 안목과 신앙적 열정을 지녔던 인물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사 연구자들과 성도들에게 이수정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한 지식인을 넘어, 미국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부르는 ‘마케도니아인의 외침’을 실행하고 마가복음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초기 선교의 문을 연 결정적인 인물로 기억됩니다. 이 글에서는 이수정의 도일 배경과 회심 과정, 한글 성경 번역 사역, 그리고 그의 헌신이 한국 교회에 남긴 역사적·신앙적 유산을 객관적 사실을 중심으로 상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수정의 도일 배경과 신앙 수용의 여정

이수정은 19세기 말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지식인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근대 문물을 수용하여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온건 개화파 성향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된 계기는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우연이 아닌,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실천적 고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사유람단 수행과 쓰다 센과의 만남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위기에서 구출하는 데 기여했던 이수정은 관직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새로운 근대 문물을 직접 배우기 위해 일본행을 택했습니다. 1882년 9월, 제3차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도쿄에 도착한 그는 일본의 농업, 우편, 교육 등 근대 사회 제도를 두루 시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수정은 일본 근대 농학의 선구자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쓰다 센(津田仙)을 방문하게 됩니다. 농업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방문한 자리에서 이수정은 벽에 걸려 있던 한문 족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족자에는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예수의 산상수훈인 ‘팔복(八福)’ 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구절은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이수정에게 깊은 사상적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농업 기술을 배우러 간 자리에서 그는 근대 서구 문명의 도덕적·정신적 기초가 바로 기독교에 있음을 직감하고 성경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심과 야스가와 로쿠사부로 목사에게 받은 세례

쓰다 센을 통해 한문 성경을 전해 받은 이수정은 진지한 태도로 성경을 통독했습니다. 그는 유교의 도덕관을 뛰어넘는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깨닫고 점차 기독교를 자신의 인격적 신앙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이수정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조지 녹스(George W. Knox)와 교류하며 성경을 더욱 깊이 연구했고, 마침내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883년 4월 29일, 그는 도쿄 로게쓰초(芝露月町) 교회에서 미국 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녹스 목사의 입회하에 일본인 야스가와 로쿠사부로(安川亨)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해외에서 공인된 절차를 거쳐 개신교 세례를 받은 최초의 조선인 지식인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2. 한글 성경 번역과 권서 사역의 실행

이수정은 세례를 받은 직후 자신이 발견한 복음의 진리를 조국 동포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앙을 개인의 안녕에 국한하지 않고 민족의 계몽과 영혼 구원을 위한 통로로 여겼으며, 이를 실행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과업으로 성경 번역을 설정했습니다.

성경 번역의 4단계 실행 과정

이수정의 성경 번역 사역은 치밀하고 체계적인 단계에 따라 추진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성서공회(American Bible Society, ABS)의 일본 지부 총무였던 헨리 루미스(Henry Loomis) 목사는 이수정의 탁월한 한문 실력과 높은 학식을 확인하고 그의 성경 번역 프로젝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 사복음서 및 사도행전 현토(懸吐) 한한(漢韓)성경 편찬 (1883년): 당시 한문 해독력이 있는 식자층을 위해 기존의 한문 성경(브릿지맨-컬버트슨 역본)에 한글 토(토씨)를 달아 읽기 쉽게 만든 성경입니다. 신약성서의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이 이 방식으로 출간되어 한자 교육을 받은 조선 지식인층이 성경의 문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 순한글 마가복음서 원고 번역 (1883~1884년): 한자를 모르는 일반 서민과 부녀자들을 위해 순수 한글로 된 성경 번역에 착수했습니다. 이수정은 문맥이 비교적 명료하고 행동 중심적인 구성을 지닌 마가복음을 우선 번역 대상으로 삼아 정밀한 번역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 교정 및 활자 제작 협력 (1884년): 요코하마 복음사(福音社) 인쇄소에서 활자 인쇄를 진행하기 위해 한글 활자를 직접 감수하고 교정했습니다. 이수정의 꼼꼼한 어학적 감수는 본문 번역의 정확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 인쇄 및 보급 준비 (1885년): 1885년 2월, 마침내 최초의 순한글 마가복음서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 6천 권이 정식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성경은 이후 한국에 들어오는 서구 선교사들의 손에 들려 조선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번역 과정의 판단 기준과 주의해야 할 역사적 사실

이수정의 성경 번역을 평가할 때 역사적으로 유의해야 할 기준과 사실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 만주 로스 역본과의 차이점 인식: 만주 우장(牛莊)에서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와 백홍준, 이응찬 등이 번역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서》(1882년)는 평안도 서북 방언을 기반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반면 이수정의 마가복음은 한양(서울)의 표준적인 지식인 문체를 반영하여 번역되었습니다. 두 역본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 한반도 북부와 중부 지역에 각각 복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 번역 대본의 한계: 이수정은 헬라어 원문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권위 있는 한문 성경 역본과 일본어 번역본을 대조하여 조선어 표현으로 옮겼습니다. 따라서 원어적 직역보다는 당시 유교 문화권의 언어 감각에 맞춘 의역과 한자어 혼용 표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연구해야 합니다.
  • 단독 사역이 아닌 국제적 연대: 이수정의 번역은 개인의 작업에 머물지 않고 미국성서공회의 재정적·행정적 지원, 일본인 목회자 및 선교사들과의 신학적 검토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협력 사역이었습니다.

3. 서양 선교사를 향한 호소와 한국 선교의 개척

이수정의 공헌은 활자화된 성경 출간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구 교회가 미지의 나라인 조선에 관심을 갖고 공식적인 선교사를 파송하도록 강력한 영적 촉매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마케도니아인의 외침: 기독교 선교 잡지 기고문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환상 중에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부름을 들었던 것처럼, 이수정은 1883년 12월 미국의 대표적 선교 잡지인 《미국 선교 연구(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에 공개 호소문을 보냈습니다. 영문으로 번역되어 게재된 이 편지에서 그는 조선의 척박한 영적 상황과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복음을 전해줄 사역자들을 파송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조선은 아직 주의 도를 알지 못하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지혜와 신앙을 갖춘 일꾼들이 속히 건너와 우리 백성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호소문은 미국 교회와 신학교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신학교를 졸업하고 아시아 선교를 준비하던 청년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는 이 글에 깊은 도전을 받았으며, 이는 그들이 선교지를 조선으로 최종 결정하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제물포 입국과 그 의의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 선교사와 미국 북감리교의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가 제물포(인천) 항구에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이들이 조선 땅에 입국할 때 그들의 가방 속에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이수정이 번역하고 출판한 《신약마가젼복음셔언해》가 실려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자국의 언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입국하여 사역을 시작한 다른 국가들과 달리, 한국 선교는 선교사가 입국 첫날부터 원주민의 언어로 인쇄된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손에 들고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초기 복음 전파의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졌으며, 이수정은 선교사의 입국 길을 사전에 닦아놓은 ‘한국의 세례 요한’과 같은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4. 이수정의 귀국과 순교적 최후, 그리고 역사적 재평가

이수정의 말년은 구한말의 소용돌이치는 정치적 격변과 맞물려 비극적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마지막 궤적은 신앙적 절의와 역사적 평가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깊이 음미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귀국과 비극적 죽음

1884년 12월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발발하면서 일본 내 조선인 사회와 개화파 인물들의 처지는 극도로 불안정해졌습니다. 비록 이수정은 정변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일본에 체류하던 개화 성향의 지식인이었기에 보수화된 조선 조정의 의심과 견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신변에 닥칠 위험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수정은 1886년 5월 고국으로 귀국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체포되어 엄혹한 문초를 받았으며, 같은 해 충청도 해미(또는 아산 공주 일대로 기록되기도 함)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치적 숙청의 성격과 함께 서양 종교를 수용하고 확산시켰다는 배교적 죄목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던 것으로 교회사학계는 평가합니다.

이수정의 생애가 오늘날 신앙인에게 남긴 점검표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이수정의 삶을 통해 묵상하고 점검해 보아야 할 실천적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 [ ] 성경 중심의 신앙 확립: 교리나 제도를 앞세우기보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깊이 탐구하고 삶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가?
  • [ ] 문화와 복음의 분별: 외부 문물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문명의 참된 기초가 되는 복음의 본질을 분별해 내는 통찰을 지녔는가?
  • [ ] 공동체를 향한 헌신: 개인의 구원과 은혜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속한 민족과 이웃의 복음화를 위해 구체적인 행동(성경 번역, 문서 선교 등)을 실행하고 있는가?
  • [ ] 고난 앞에서의 정직한 용기: 정치적 상황이나 환경의 유불리에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내고 있는가?

핵심 질문과 답변 (FAQ)

Q1. 이수정은 존 로스 목사와 함께 일했나요?

아닙니다. 두 사람은 활동한 지역과 협력자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는 중국 만주(심양, 고려문) 지역에서 의주 출신의 한국인 청년들(백홍준, 이응찬, 서상륜 등)과 함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반면 이수정은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독자적으로 번역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두 흐름은 압록강을 통한 북방 선교 루트와 제물포를 통한 남방 선교 루트로 각각 한국 교회에 연결되었습니다.

Q2.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은 초기 한국 교회에서 얼마나 활용되었나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반입한 이수정 역 마가복음은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기초 텍스트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초기 전도 문서로 널리 배포되었습니다. 이후 한국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 공동으로 구성한 ‘성경번역자회’가 1900년에 신약성경 전체를 우리말로 공인 완역하기 전까지, 이수정 역본은 한국인들에게 생생한 복음의 기초를 제시하는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Q3. 이수정을 기독교 순교자로 공식 인정할 수 있나요?

교단과 역사가에 따라 세부적인 해석의 차이는 존재합니다. 그의 처형 과정에는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를 겨냥한 정치적 탄압의 성격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사 연구자들은 이수정이 귀국 시 직면할 생명의 위협을 알면서도 신앙적 양심을 타협하지 않고 귀국을 택했다는 점, 그리고 서학(기독교)에 연루된 지식인으로서 신앙을 부인하지 않고 최후를 맞이했다는 점에서 그의 삶을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한 순교자적 신앙의 표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