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2년 통일령(Act of Uniformity 1662)은 영국의 정치사와 교회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결정적인 분수령 중 하나로 꼽힙니다. 16세기 헨리 8세의 수장령에서 시작된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엘리자베스 1세 시대를 거치며 독특한 타협점인 ‘중용(Via Media)’의 형태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예전과 교회 조직의 완전한 개혁을 요구하던 청교도(Puritans)와 전통적인 주교제 및 국교 질서를 수호하려던 고교회파의 갈등은 끝내 17세기 영국 내전(청교도 혁명)이라는 비극적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끌던 공화정(호국경 정치)이 종식되고 1660년 찰스 2세가 왕정복고를 통해 복위하면서, 잉글랜드 교회는 다시 한번 거대한 제도적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662년 5월 의회를 통과한 통일령이었습니다. 이 법령은 단순히 예배의 통일을 넘어 영국 교회를 영구적으로 재편하고, 현대 비국교도(Nonconformists)와 자유교회(Free Churches) 전통을 잉태한 사건이었습니다. 1662년 통일령의 역사적 배경, 법률이 요구한 핵심 조건과 판단 기준, 집행 과정, 그리고 그 영향과 주의할 해석적 예외를 체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1662년 통일령의 제정 배경과 사보이 회의
1660년 찰스 2세는 브레다 선언(Declaration of Breda)을 통해 왕정에 복귀하면서 종교적 관용을 약속했습니다. 그는 국가의 안정을 해치지 않는 한 신앙의 양심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이에 따라 장로교파 청교도들과 영국 국교회(성공회) 주교들은 국교회의 새로운 예배 지침을 협의하기 위해 1661년 사보이 회의(Savoy Conference)를 소집했습니다.
사보이 회의의 좌절과 갈등의 격화
사보이 회의에서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를 비롯한 온건한 청교도 지도자들은 국교회 안에서 포용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감독직(주교제) 자체를 전면 부정하기보다는 의회주의적 감독제를 수용할 용의가 있었으며, 예배의 형식에 대해서도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유연한 수정을 요구했습니다. 청교도 측이 제기한 주요 수정 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유아세례 시 십자가 성호를 긋는 행위의 폐지 또는 자율화
-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행위 강제 철회 (성찬물 숭배의 오해 방지 목적)
- 사제들의 백색 성의(Surplice) 착용 강제 철회
- 외경(Apocrypha) 본문의 성경 봉독 제외
- 목회자의 즉흥 기도(자유 기도)의 일정 부분 허용
그러나 의회를 장악한 왕당파와 엄격한 주교제 옹호자들(캐벌리어 의회)은 내전 기간 동안 겪었던 박해와 왕권 약화의 책임을 청교도 진영에 돌리며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주교들은 청교도들의 요구를 거의 수용하지 않았고, 회의는 아무런 타협점 없이 결렬되었습니다. 의회는 국가와 교회의 안정을 오직 ‘엄격한 제도적 통일’에서만 찾으려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1662년 5월 19일에 공포된 새로운 통일령이었습니다.
2. 통일령의 법적 조건과 성직자 적격 여부 판단 기준
1662년 통일령은 잉글랜드와 웨일스 전역의 성직자, 대학 교수, 학교 교사들에게 예외 없는 복종을 강제했습니다. 법령에 명시된 자격 기준은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는 엄격한 형태였습니다.
제도적 통일을 위한 4대 핵심 요구 조건
당시 성직자들이 직위를 유지하기 위해 충족해야 했던 조건은 크게 네 가지였습니다.
- 1662년 개정 공동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에 대한 전적인 동의: 성직자는 기도서에 담긴 모든 예식, 교리, 기도문에 대해 “나의 온전하고 진정한 동의와 승인(unfeigned assent and consent)”을 공적으로 선언해야 했습니다.
- 주교에 의한 재서품(Episcopal Re-ordination) 의무화: 내전 기간이나 공화정 기간 동안 장로교 방식으로 서품받은 목회자들은 주교의 안수를 다시 받아야 했습니다. 이는 장로회의 서품 권한을 교회론적으로 무효화하는 조치였습니다.
- 국왕 지고권 및 비저항 선서: 국왕의 권위에 저항하여 무기를 드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불법임을 선서해야 했습니다.
- 엄숙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 파기 선언: 1643년 청교도들과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맺었던 교회 개혁 언약이 불법적이고 구속력이 없음을 맹세해야 했습니다.
당시 성직자들의 자격 판단 기준 체크리스트
성직자 개인은 1662년 8월 24일(성 바르톨로메오 축일)까지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시 목회자들의 양심과 법률이 충돌했던 핵심 판단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 예전의 무결성 인정 여부: 성경에 직접 명령되지 않은 전통 예식(성호, 무릎 꿇기, 성의 착용)을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은 관습’으로 받아들이고 맹세할 수 있는가?
- 이전 목사 안수의 유효성: 과거 자신이 받은 장로 안수를 포기하고 주교의 손을 통해 다시 서품받는 것이, 자신이 섬겨온 이전 목회 사역을 배신하는 일이 아닌가?
- 과거 신앙 서약에 대한 양심: 내전 시기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던 개혁 언약(엄숙동맹과 언약)을 법률의 강제에 의해 무효라고 번복할 수 있는가?
- 세속 권력의 교회 간섭 한계: 국가 법률이 교회의 예배와 치리의 세부 사항까지 절대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성경적 원리로 용인할 수 있는가?
3. 통일령의 집행 순서와 ‘대추방(Great Ejection)’의 전개
1662년 통일령은 기한을 엄격하게 정해두고 체계적인 순서로 집행되었습니다. 법률 통과부터 최종 축출까지의 집행 과정은 매우 신속하고 단호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법 집행의 단계별 순서
- 1단계: 법안 통과 및 표준 기도서 배포 (1662년 5월~7월)1662년 5월 의회를 통과한 후, 수정된 새 공동기도문 인쇄본이 각 교구로 발송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쇄와 배포의 지연으로 인해 많은 지역의 목회자들은 8월 초가 되어서야 개정 기도문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2단계: 최종 기한 설정 (1662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법령은 8월 24일까지 새 기도문에 서명하고 충성 서약을 하지 않은 모든 성직자를 직위에서 자동 면직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이 날짜는 교구 목회자들이 한 해 동안 추수한 농작물에 대한 십일조 수익(성직록)을 정산받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면직된 성직자들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빈손이 되는 가혹한 일정 구조였습니다.
- 3단계: 불복종 선언과 강제 면직 집행 (대추방)기한 내에 서명을 거부한 약 2,000명 이상의 성직자, 강단 설교자,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들이 강단과 직위에서 파면되었습니다. 리처드 백스터, 존 플라벨(John Flavel),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 토마스 맨튼(Thomas Manton) 등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과 목회 역량을 지녔던 설교자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 4단계: 추가 탄압 법률의 연쇄 제정 (클래런던 법전, Clarendon Code)성직을 잃은 청교도들이 사설 모임을 열어 사역을 지속하자, 의회는 후속 법령들을 통과시켜 이들의 집회와 거주를 법적으로 봉쇄했습니다.비밀집회금지법(Conventicle Act, 1664년): 국교회 기도서를 따르지 않는 5인 이상의 비공식 예배 모임 전면 금지5마일법(Five Mile Act, 1665년): 면직된 성직자가 자신이 사역했던 교구나 자치 도시 경계 5마일(약 8km)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
4. 영국 교회사의 구조적 변화와 주의할 역사적 예외
1662년 통일령은 영국 사회와 교회사에 돌이킬 수 없는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단일한 국교 아래 머물던 영국 개신교는 국교회(Church of England)와 비국교도(Dissenters/Nonconformists)라는 두 개의 평행선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영국 교회사에 남긴 구조적 영향
- 비국교도 전통의 정착: 장로교, 독립교회(회중파), 침례교, 퀘이커 등 국교회 바깥의 신앙 집단들이 독자적인 교단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시민적 권리의 제한: 통일령과 시험법(Test Act)으로 인해 비국교도들은 19세기 초반까지 대학 입학, 의회 진출, 공직 임명에서 제도적으로 배제되었습니다.
- 청교도 영성의 저작화: 설교 강단을 빼앗긴 청교도 목회자들은 저술 활동에 매진했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 리처드 백스터의 수많은 신학·경건 서적들이 이 고난과 투옥의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사건을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할 역사적 사실과 예외
1662년 통일령을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이나 평면적인 핍박의 역사로만 해석하면 역사적 사실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균형 있는 이해를 위해 다음 사항들을 유의해야 합니다.
- 성직 박탈의 상호성: 1662년 추방된 청교도 성직자 약 2,000명의 비극은 분명하지만, 1640년대 청교도 의회가 권력을 잡았을 당시에도 주교제와 왕권을 지지하던 국교회 사제 수천 명이 직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된 전례가 있었습니다. 왕정복고기의 탄압은 내전기 박해에 대한 정치적 보복 심리가 깊게 깔려 있었습니다.
- 청교도 내부의 분열과 잔류파: 모든 청교도 성향의 목회자가 축출된 것은 아닙니다. 윌리엄 베이츠(William Bates)와 같은 일부 온건파는 고심 끝에 타협을 택하고 국교회 안에 잔류했습니다. 반면 완전히 교구를 떠난 이들은 각자의 신학적 확신에 따라 회중파, 장로파 등으로 흩어졌습니다.
- 국왕 찰스 2세의 개인적 태도: 찰스 2세는 절대적인 주교제 옹호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가톨릭 신자였던 동생 제임스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관용 선언을 통해 통일령의 엄격성을 완화하려 시도했으나, 강력한 국교회 체제를 원했던 의회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1662년 통일령 핵심 요약 점검표
- 1662년 통일령은 왕정복고 후 영국 국교회의 단일성을 강제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입니다.
- 개정 공동기도문 승인, 주교에 의한 재서품, 비저항 선서, 과거 개혁 언약 파기가 의무 조건이었습니다.
- 1662년 8월 24일(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을 기점으로 약 2,000명의 청교도 성직자가 교구에서 추방되었습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 기독교는 국교회와 비국교도(자유교회)로 완전히 양분되었습니다.
- 고난의 과정에서 저작된 청교도 문서들은 후대 기독교 영성과 문학에 지대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1662년 통일령으로 축출된 목회자들의 숫자는 정확히 몇 명인가요?
역사학자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의 초기 기록과 현대 교회사 연구자들의 실증적 조사에 따르면, 1660년 왕정복고부터 1662년 통일령 직후까지 교구 목회지, 대학교수직, 강단 설교직에서 물러난 인원은 대략 2,000명에서 2,400명 사이로 추산됩니다. 이 사건은 영국 교회사에서 ‘대추방(The Great Eject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Q2. 청교도들은 왜 단순한 기도서 사용과 예식 절차를 거부했나요?
청교도들에게 성경은 교회의 신앙뿐 아니라 예배의 형식까지 규정하는 최종 권위였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성호 긋기, 제단 앞 무릎 꿇기, 특정 성의 착용 등이 로마 가톨릭의 잔재이며 성찬을 우상화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국가 법률이 양심을 거슬러 이러한 외적 형식을 절대적인 구속력으로 강제하는 것을 영적 타협으로 여겼기 때문에 교구와 생계를 포기하고 거부했습니다.
Q3. 1662년 통일령은 언제 공식적으로 효력을 잃거나 완화되었나요?
통일령 자체의 형벌적 조항과 가혹한 탄압은 1688년 명예혁명 이후 통과된 1689년 관용법(Toleration Act 1689)을 통해 상당 부분 완화되었습니다. 관용법은 비국교도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고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한, 자신들만의 예배 처소를 등록하고 집회를 열 수 있는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그러나 비국교도의 완전한 공직 취임과 대학 입학 자유 등 시민적 평등권은 19세기 초반(1828년 심사령 폐지 등)에 이르러서야 온전히 회복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