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조선은 정치적 격변과 외세의 압력 속에서 전통적인 신분 질서와 사회 제도의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 땅을 밟은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교리 전파에 앞서 서양 근대 의술과 근대식 교육 기관을 매개로 조선 사회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선교는 영혼 구원이라는 본질적 사명과 함께, 질병과 무지 속에 고통받는 이웃을 긍휼히 여기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실천하는 전인적 사역을 포괄합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세운 의료 기관과 교육 기관은 당시 봉건적 사회 구조 아래 소외되었던 민중과 여성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하며 근대화의 기초를 닦는 결정적인 통로가 되었습니다.
1. 초기 의료 선교의 시작과 근대 병원 설립 과정
조선 정부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으나, 여전히 기독교 신앙의 자유나 포교 활동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금교(禁敎)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등 해외 선교부는 조선의 법과 관습을 존중하면서도 이웃을 섬길 수 있는 간접 선교 방식으로 의료와 교육 분야를 우선 선택했습니다.
알렌 선교사와 제중원(광혜원)의 탄생 배경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소속의 호러스 앨런(Horace N. Allen, 한국명 안련) 의사는 1884년 9월 의료 선교사 자격으로 한양에 입국했습니다. 공식적인 선교 활동이 불가능했던 그는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신분을 유지하며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같은 해 12월,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발발하면서 수구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민영익이 칼을 맞고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전통 한의학적 처치로는 지혈과 봉합이 어려워 생명이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앨런은 서양 외과 수술 기법을 적용해 상처를 봉합하고 지혈하며 감염을 막아 민영익을 살려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종 황제와 조선 조정은 서양 근대 의술의 효용성을 깊이 인정하게 되었고, 앨런의 건의를 수용하여 1885년 4월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국립 병원인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했습니다. 광혜원은 개원 직후 ‘널리 은혜를 베풀어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제중원에서 세브란스 병원으로의 발전 단계
제중원은 정부가 건물과 운영 재정을 지원하고, 선교 의사들이 진료를 전담하는 민관 협력 형태로 출발했습니다. 이후 제중원은 단순한 진료소를 넘어 체계적인 서양 의학 교육 기관과 현대적 종합 병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 초기 진료와 인력 보강 (1885~1890년대 초): 앨런의 뒤를 이어 존 헤론(John W. Heron) 등이 진료를 이어받았으며, 1893년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 한국명 어비신) 의사가 내한하면서 체계적인 근대 의학 교육과 조직 정비가 본격화되었습니다.
- 운영권 이관 (1894년): 조선 정부의 재정난과 관리 체계의 혼선으로 병원 운영이 불안정해지자, 에비슨의 요청에 따라 조선 조정은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공식 이관했습니다. 이로써 제중원은 완전한 민간 선교 병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 세브란스 병원 신축 (1904년): 에비슨 선교사는 미국 순회 모금 중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자선사업가 루이스 H.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유치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1904년 서울 남대문 밖(현재의 서울역 인근 복숭아골)에 최신 설비를 갖춘 병원 건물을 완공하고, 후원자의 이름을 기려 ‘세브란스 기념 병원’으로 명명했습니다.
- 한국인 면허 의사 배출 (1908년): 에비슨을 중심으로 서양 의학 교과서 번역과 임상 실습이 축적되면서, 1908년 제1회 졸업생 7명(박서양, 김필순 등)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대한제국 내부위생국으로부터 대한민국 제1호 정식 의사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2. 근대 교육 선교와 초기 사학의 발전 역사
조선의 전통 서당과 향교 교육은 양반 사대부 중심의 유학 경전 암송과 과거 시험 대비에 치중되어 있었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신분과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배움의 문을 열어주고자 초등 및 중등 교육 기관을 설립했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교육 개척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미국 장로회의 호러스 G.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한국명 원두우)와 미감리회의 헨리 G.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두 선교사는 각 교단의 차이를 넘어 조선의 근대 교육 기틀을 세우는 데 동역했습니다.
- 배재학당(培材學堂, 1885년 설립): 아펜젤러 선교사가 서울 정동 사저에서 두 명의 학생을 모아 영어를 가르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886년 고종은 ‘유용한 인재를 길러내는 집’이라는 뜻의 ‘배재학당’이라는 사액 현판을 하사했습니다. 배재학당은 주입식 유학 교육 대신 영어, 수학, 과학, 세계사 등 근대 실용 학문과 노작 교육, 체육 활동을 도입했으며, 서재필, 이승만, 주시경 등 구한말 개화와 독립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들을 배출했습니다.
- 언더우드학당과 경신학교 (1886년 설립): 언더우드 선교사는 부모를 잃거나 가난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숙식을 제공하며 가르치는 고아학교(구제학당)로 교육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 학교는 훗날 예수교학당, 경신학교로 개편되며 근대 중등 교육의 중심축으로 성장했고, 1915년에는 고등 교육 기관인 조선기독교대학(연희전문학교, 현 연세대학교)으로 발전하는 모태가 되었습니다.
스크랜턴 부인과 이화학당: 여성 근대 교육의 지평
유교적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독립된 인격체나 배움의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미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WFMS)의 파송을 받아 1885년 내한한 메리 F. 스크랜턴(Mary F. Scranton) 선교사는 1886년 5월 한 명의 여학생(김부인)을 대상으로 서울 정동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1887년 고종은 배화와 계몽을 격려하며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했습니다.
스크랜턴 부인은 조선 여성들을 서구화된 이방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선 여성을 보다 긍지 있고 유능한 조선인으로 길러내는 것”을 교육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한글과 기초 산술, 위생, 바느질, 성경을 가르치며 시작된 이화학당은 억압받던 여성들에게 지적 능력을 일깨우고 주체적인 인격을 회복시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사회 지도자를 배출하는 요람이 되었습니다.

3. 초기 선교 사역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판단 기준과 주의할 예외
초기 기독교 선교 역사에 접근할 때는 당시의 시대적 제약과 복합적인 역사적 맥락을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합니다.
역사적 사실 확인을 위한 4가지 판단 기준
- [ ] 선교사의 개인 문서와 공식 공문서의 교차 검증: 선교사 개인의 일기나 편지는 당시의 생생한 감정과 일화를 전하지만 주관적 시각이 반영될 수 있습니다. 조선 조정의 승정원일기, 일성록, 각국 외교 문서 등 공적 기록과 대조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해야 합니다.
- [ ] 설립 주체와 후원 구조의 명확한 구분: 초기 기관 중에는 순수 선교사 단독 자본으로 세워진 곳뿐 아니라, 광혜원처럼 조선 정부가 부지와 건물을 대고 선교사가 의료 기술을 제공한 협력 모델도 존재함을 인지해야 합니다.
- [ ] 초기 교단의 협력적 복음주의 성격 파악: 장로교와 감리교는 신학적 전통과 교단 헌법이 달랐으나, 선교 초기 ‘선교공의회’를 조직하고 선교지 분할 협정(Comity Arrangement, 예과 분할)을 맺어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고 연합 사역(세브란스 의학교, 숭실학당 등 공동 운영)을 전개했습니다.
- [ ] 복음의 본질과 제국주의 외교 정책의 분리: 선교사 개개인의 헌신적인 사랑과 긍휼 사역을 높이 평가하되, 당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팽창 정책이나 자국 보호 우선주의와 같은 외교적 한계를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주의할 예외와 흔한 역사적 오해
초기 선교 역사 연구나 학습 시 다음과 같은 혼동을 주의해야 합니다.
-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 주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성경을 처음 번역하여 들여온 것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실제 최초의 한글 성경(1882년 예수셩교누가복음전셔, 1887년 예수셩교전서)은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와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 한국인 조력자들의 협력으로 완역되었습니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마가복음을 번역(1885년)하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할 때 들여왔습니다.
- 의료 및 교육 기관의 종교적 강제성 여부: 초기 선교 병원과 학교는 선교의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학생과 환자들에게 개종을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 조정의 금교령 준수 약속을 지키면서 봉사와 인술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독교적 인격과 가치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4. 초기 선교 유적 및 사료 조사 실행 순서
초기 기독교 역사와 선교사들의 사역 흔적을 직접 탐방하거나 학술적·신앙적으로 조사할 때는 체계적인 순서로 접근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 기초 문헌 및 교단 사료 검토: 조사하려는 인물(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앨런 등)의 내한 연도, 파송 선교부, 주요 활동 거점에 대한 기초 서지 목록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등의 공인된 자료를 통해 확인합니다.
- 선교 거점 중심의 지리적 동선 계획: 서울 정동(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정동제일교회, 구세군역사박물관 등)과 신촌(연세대학교 언더우드가 기념관, 세브란스 역사자료실) 등 초기 선교 거점 지역의 보존 건물과 표석 위치를 사전에 파악합니다.
-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현장 방문 및 비문 조사: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 선교사 묘원을 방문하여 헐버트, 아펜젤러 일가, 언더우드 일가, 헤론 등 초기 선교사들의 묘비명과 활동 기록을 대조하며 그들의 헌신과 생애 주기를 현장에서 확인합니다.
- 신앙적 묵상과 오늘날의 적용점 도출: 단순한 유적 답사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자신의 기득권과 안전을 내려놓고 조선의 약자들을 위해 헌신했던 복음주의적 삶의 태도를 개인의 신앙과 공동체 사역에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기록합니다.
핵심 질문과 답변 (FAQ)
Q1. 초기 선교사들이 직접적인 전도 대신 병원과 학교를 먼저 세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에도 기독교 선교와 포교를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법적 규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은 현지 법을 준수하면서도 굶주림과 질병, 배움의 부재로 신음하던 민중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자 서양 의술과 근대 교육을 접목한 간접 선교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는 고난받는 이웃을 돌보라는 성경적 명령을 이행하는 긍휼 사역이자, 조선 사회의 신뢰를 얻는 자연스러운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Q2. 제중원은 기독교 기관이었나요, 아니면 조선 정부의 관립 병원이었나요?
1885년 설립 당시에는 부지와 건물, 관리 인력을 조선 정부가 제공하고 선교 의사가 진료를 맡았던 일종의 국립(관립) 병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 악화와 운영상의 비효율이 겹치면서 1894년 선교부로 운영권이 공식 이관되었고, 1904년 세브란스의 기부를 통해 완전한 민간 선교 병원으로 정착했습니다.
Q3. 이화학당 설립 초기에 일반 백성들은 서양 선교사의 학교를 어떻게 바라보았나요?
초기에는 서양인에 대한 낯섦과 ‘아이들을 유괴한다’는 식의 악의적인 소문(유언비어) 때문에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를 꺼렸습니다. 스크랜턴 부인이 처음 돌본 학생들도 생계가 곤란하거나 버려진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진심 어린 보살핌과 서양식 교육의 유익함이 알려지면서 점차 신뢰가 형성되었고, 왕실의 공식 인정(이화학당 사액)을 받으며 근대 여성 교육의 명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