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기독교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국가 권력과 교회의 예배 양심이 정면으로 충돌했던 결정적인 분기점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1662년에 공포된 통일령(Act of Uniformity 1662)입니다. 이 법령은 단순한 의회 입법에 그치지 않고, 수천 명의 목회자가 강단을 떠나야 했던 ‘대추방(The Great Ejection)’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낳았습니다.
오늘날 개혁 복음주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일은 매우 유익합니다. 당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목숨처럼 지키고자 했던 성경적 예배 원리와 국가 교회의 제도적 통제 사이에서 무엇이 참된 신앙의 기준이었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 교회사에서 1662년 통일령이 지니는 역사적 위치와 그 전개 과정,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삶에 주는 구체적인 기준을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1. 1662년 통일령 공포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과정
16세기 잉글랜드 종교개혁은 대륙의 종교개혁과 달리 튜더 왕조의 정치적 필요와 맞물려 진행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는 교리적으로는 개혁신학을 수용하면서도, 외형과 직제는 중세 가톨릭의 감독제와 전례적 요소를 상당 부분 유지하는 타협적 구조를 띠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완전한 개혁에 반대하며 성경의 온전한 권위 아래 교회의 순결과 예배의 갱신을 추구했던 이들이 바로 ‘청교도(Puritans)’였습니다.
17세기 중반, 찰스 1세의 전제 정치와 종교 정책에 저항하여 일어난 청교도 혁명과 내전을 거치며 영국은 크롬웰의 공화정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소집되어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이 제정되는 등 장로교와 독립파 중심의 개혁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의 사후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지자, 1660년 찰스 2세가 즉위하며 왕정복고(Restoration)가 이루어졌습니다.
찰스 2세는 즉위 전 ‘브레다 선언(Declaration of Breda)’을 통해 온건한 양심의 자유를 보약속했으나, 복귀한 보수 왕당파와 고교회파 주교들은 의회를 장악하고 강력한 국교회 단일 체제를 복원하려 했습니다. 이들은 찰스 2세 치하에서 ‘클라렌던 법전(Clarendon Code)’이라 불리는 일련의 억압 법안들을 연이어 통과시켰으며, 그 핵심 정점이 바로 1662년 5월 19일 의회를 통과한 통일령이었습니다.
2. 통일령의 법적 조건과 청교도 목회자의 판단 기준
1662년 통일령은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모든 성직자, 대학 교수, 학교 교사들에게 매우 엄격하고 양보할 수 없는 법적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법안이 제시한 마감 시한은 성 바르톨로뮤 축일인 1662년 8월 24일이었습니다. 이날까지 법적 요건을 수용하지 않는 성직자는 즉시 모든 직위와 성록(교구 수입)을 박탈당하도록 명시되었습니다.
통일령이 규정한 핵심 요구 조건
1662년 통일령에 담긴 구체적인 법적 의무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모든 교역자는 개정된 기도서에 수록된 모든 의식, 전례문, 기도문에 대하여 “진정한 인정과 동의(unfeigned assent and consent)”를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했습니다.
- 1662년 개정 공동기도문(Book of Common Prayer)에 대한 전적인 무조건 동의
공화정 시기에 장로회나 회중교회 방식으로 안수받은 목회자들은 기존의 목사직을 무효로 인정하고, 반드시 성공회 주교에게 다시 안수를 받아야 했습니다.
- 성공회 주교에 의한 재서품(Episcopal Ordination) 의무화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왕에게 무력으로 저항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요구했습니다.
- 국왕 지고권(Royal Supremacy)과 비저항 선서
스코틀랜드와 맺었던 종교 개혁 동맹과 언약이 불법적이고 구속력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부인해야 했습니다.
- 엄숙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 파기 선서
청교도 목회자들의 거부 이유와 신앙적 판단 기준
많은 청교도 목회자들은 공동기도서 자체를 완전히 배격한 것은 아니었으나, 성경에 명시적 근거가 없는 인간의 전례적 관습을 구원의 필수조건처럼 강제하는 것에 대해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 유아세례 시 십자가 성호 긋기: 세례의 본질적 의미를 넘어 미신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 성찬 시 무릎 꿇기(Kneeling at Communion): 빵과 포도주 자체를 숭배하는 가톨릭의 화체설적 잔재로 오인될 위험성을 경계했습니다.
- 예배 중 흰색 성의(Surplice) 착용 강제: 구약 제사장 직분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훼손하고 신약 성직자를 특별 계급화한다는 이유로 반대했습니다.
- 외경(Apocrypha) 낭독의 의무화: 성경 66권 외에 외경 문서를 공예배 정규 본문으로 낭독하도록 강제한 규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 주교 재서품의 거부: 장로회에서 받은 기존의 정당한 목사 안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질서를 모독하는 행위로 판단했습니다.
결국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존 플라벨(John Flavel), 토마스 브룩스(Thomas Brooks) 등 2,000명 이상의 유력하고 경건한 목회자들은 교구와 사택에서 쫓겨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를 영국 교회사에서는 ‘대추방(The Great Ejection)’이라 부릅니다.
3. 대추방 이후 억압 법안과 비국교도(Dissenters)의 형성 순서
통일령 거부로 인해 강단에서 쫓겨난 목회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신자들은 ‘비국교도(Nonconformists / Dissenters)’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 의회는 이들이 따로 모여 예배하거나 공동체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후속 억압 조치를 연속적으로 실행했습니다.
비국교도 탄압의 실행 순서와 법적 제재
국교회의 공동기도서 전례를 따르지 않는 5인 이상의 사적 종교 집회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적발 시 거액의 벌금형과 투옥, 상습 적발 시 해외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 1664년 비밀집회금지법(Conventicle Act)
통일령 선서를 거부한 목회자는 자신이 목회했던 교구나 자치 도시 경계로부터 5마일(약 8km) 이내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격리했습니다. 이는 목회자들이 옛 성도들을 돌보거나 경제적 지원을 받는 통로를 차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1665년 5마일법(Five Mile Act)
국교회의 성찬 예식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군대, 공직, 대학 입학 및 학위 취득을 전면 금지하여 사회적 진출을 원천적으로 봉쇄했습니다.

- 1673년 심사법(Test Act)
이 가혹한 박해 속에서도 비국교도들은 숲속, 헛간, 개인 가정집에 은밀히 모여 예배를 지속했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은 비밀 집회에서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베드퍼드 감옥에 12년간 수감되었으며, 바로 그 고난의 자리에서 불후의 고전인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집필했습니다.
비국교도 운동은 장로교, 독립교회(회중파), 침례교, 퀘이커 등으로 분립되어 각자의 신앙고백을 발전시켰으며, 마침내 1689년 명예혁명 이후 제정된 ‘관용법(Toleration Act 1689)’을 통해 제한적인 예배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4. 역사 이해 시 주의할 점과 오해하기 쉬운 예외 사항
1662년 통일령과 교회사적 사건을 균형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복잡한 정치·종교적 맥락을 정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왕정복고파 주교들과 정치가들은 지난 청교도 혁명과 내전으로 인한 국왕 처형, 사회적 극단주의의 발호를 경험했기에, 국가의 안녕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단일한 종교적 통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들의 동기에는 신앙적 교만뿐만 아니라 정치적 불안감이 깊이 깔려 있었습니다.
- 국교파와 비국교파의 관계를 단순한 ‘악과 선’의 이분법으로 재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리처드 백스터를 비롯한 많은 온건 청교도들은 국교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국교회 안에서 포용력 있는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끝까지 바랐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일치를 위해 양보할 수 있는 영역은 최대한 협조하려 했으나, 비본질적인 것을 구원의 필수조건처럼 강제하는 지점에서 양심상 물러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 대추방당한 목회자 전원이 분리주의자(Separatists)였던 것은 아닙니다.
스코틀랜드는 독자적인 장로교 전통(언약도, Covenanters)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통일령과는 다른 차원의 물리적 저항과 ‘도살의 시대(The Killing Time)’라 불리는 혹독한 유혈 박해를 겪었습니다. 따라서 영국의 지역별 종교적 합의 구조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교회의 상황은 잉글랜드와 달랐습니다.
5. 핵심 확인 체크리스트
1662년 통일령의 교회사적 성격과 개혁 복음주의적 평가 기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662년 통일령의 성격과 영향 점검표
- [ ] 성격: 국가 권력이 국가 교회의 단일한 전례(공동기도서)를 강제한 입법
- [ ] 분기점: 1662년 8월 24일(성 바르톨로뮤 축일)을 기점으로 2,000여 명 목회자 추방
- [ ] 후속 탄압: 비밀집회금지법, 5마일법, 심사법을 통한 사회적·종교적 배제
- [ ] 결과: 영국 사회에서 국교회와 제도적으로 구별되는 ‘자유교회(Free Church / Dissenters)’ 전통 확립
현대 신앙인이 돌아보아야 할 예배와 양심의 기준
- [ ] 성경의 최고 권위: 인간의 전통이나 국가 권력의 요구보다 성경 말씀을 신앙과 삶의 최종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 [ ] 예배의 순결성: 복음의 본질을 흐리거나 미신적 요소를 가미하는 외형적 화려함을 경계하고 있는가?
- [ ] 양심의 자유 존중: 비본질적인 아디아포라(Adiaphora, 중립적 문제)를 절대화하여 형제자매의 신앙 양심을 억압하지 않는가?
- [ ] 고난 중의 충성: 신앙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물질적 손해나 사회적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6. 오늘날의 삶과 신앙을 위한 성찰
1662년 통일령의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깊은 신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추방당한 목회자들은 안정된 수입, 사회적 존경, 쾌적한 사택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었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가난과 질병, 투옥의 위협 속에서 남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이들이 타협하지 않았던 이유는 사소한 예식에 대한 고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국가 권력이라 할지라도 성도의 양심을 주관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의식을 강제할 권한이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제도적 박해를 받지 않는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만능주의와 세속적 편의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압박 앞에서 우리의 예배 양심을 쉽게 양보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1662년의 선진들이 보여준 타협 없는 말씀 중심의 신앙과 경건의 유산은, 혼탁한 세상을 거슬러 참된 복음의 터 위에 교회를 세워가야 할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어 줍니다.
7. 자주 묻는 질문 (FAQ)
Q1. 1662년 통일령으로 추방된 청교도들은 모두 영국을 떠나 아메리카로 이주했나요?
A. 아닙니다. 메이플라워호(1620년)를 타고 떠난 초기 분리주의 청교도들이나 1630년대 매사추세츠만 식민지로 대거 이주했던 대이주(Great Migration) 시기와 달리, 1662년 대추방 당시의 목회자들 대다수는 영국 땅에 남아 고난을 견디며 비밀리에 목회를 이어갔습니다. 이들이 영국 본토에 남아 세운 신앙 공동체들이 훗날 영국의 장로교, 회중교회, 침례교 등 독립 자유교회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Q2. 통일령에서 강제한 1662년 공동기도서는 잘못된 이단적 문서였나요?
A. 그렇지 않습니다. 1662년 공동기도서는 토머스 크랜머의 종교개혁적 유산을 담고 있는 탁월한 전례서였으며, 복음주의적 교리를 다수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이 문제 삼은 것은 기도서 전반이 아니라, 성경적 근거가 희박한 몇몇 가톨릭적 전례 행위(십자가 성호, 무릎 꿇는 성찬 등)를 법으로 절대화하여 모든 목회자에게 강제했기 때문입니다. 즉, 내용 전체의 이단성 여부가 아니라 ‘인간의 규례를 양심에 강제하는 방식’이 문제였습니다.
Q3. 개혁 복음주의에서는 1662년 통일령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A. 개혁 복음주의는 이 사건을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주권과 성경적 예배의 규범적 원리를 지키기 위한 거룩한 투쟁’으로 평가합니다. 제도적 안락함보다 성경의 권위와 양심의 순결을 선택했던 청교도들의 결단은 이후 조나단 에드워즈, 조지 휫필드, 찰스 스펄전 등으로 이어지는 복음주의 영적 대각성 운동의 신학적·영적 밑거름이 되었다고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