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근대 의료와 교육, 그리고 민족의 위기 속에서 정의를 세우는 데 깊이 참여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캐나다 출신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 박사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인권 회복에 일생을 바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라 일제의 탄압 현장을 직접 조사하고 세계에 알린 기록자이자 증인이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가 남긴 역사적 행적과 신앙적 삶의 여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참된 신앙의 사회적 책임과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스코필드 박사의 내한 배경과 초기 사역
수의학자이자 교육 선교사로서의 첫걸음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는 1889년 영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토론토대학교에서 수의학을 전공하고 최연소 교수로 임용될 만큼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은 인재였습니다.
1916년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전문 지식을 활용해 근대 의학 교육의 기틀을 다지는 동시에 복음주의적 신앙을 바탕으로 조선의 청년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습니다.
조선의 문화와 민중을 향한 깊은 이해
스코필드 박사는 부임 초기부터 한국어를 빠르게 익히며 조선인들의 일상과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조선인을 지배의 대상이 아닌 존엄한 이웃으로 대하며 소외된 사람들과 교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한국식 이름을 ‘돌처럼 굳은 의지와 호랑이 같은 용기, 널리 돕는 사랑’이라는 뜻을 담아 ‘석호필(石虎弼)’이라 지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이후 닥쳐올 역사적 격변기 속에서 조선 민중의 편에 서는 중요한 신앙적 동기가 되었습니다.
3·1 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의 진실을 밝히다
3·1 만세운동의 기록자이자 ’34번째 민족대표’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스코필드 박사는 현장의 비폭력 평화 시위와 일제의 무력 진압 과정을 사진과 글로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탑골공원과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를 직접 목격하고 이를 카메라에 담아 국제사회에 전송했습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방문해 옥중 실상을 점검하고 일제 총독부에 가혹행위 중단을 요구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러한 그의 헌신을 기려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에 더해 ’34번째 민족대표’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렀습니다.
제암리·고주리 학살 현장 조사와 국제적 고발
1919년 4월, 일제에 의해 화성 제암리 교회와 고주리에서 무차별 학살과 방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자전거를 탄 채 현장에 잠입해 참혹한 학살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는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제암리 잔혹 행위 보고서(The Massacre of Chai-Amm-Ni)’를 작성해 해외 언론과 선교 본부에 전달했습니다. 이 보고서는 일제의 잔혹한 식민 통치 실상을 전 세계에 폭로하며 국제 여론을 환기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광복 이후의 귀환과 마지막 헌신
대한민국으로의 귀환과 후학 양성
1920년 일제의 강압으로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돌아간 스코필드 박사는 토론토대학교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가며 세계적인 학문적 성과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을 잊지 않고 1958년 대한민국 정부의 국빈 초청을 받아 영구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자신의 사재를 털어 고아와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 사업을 펼쳤습니다. 그는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사회 정의를 촉구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하며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
1970년 4월 12일, 스코필드 박사는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울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는 현재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의 삶이 남긴 신앙적 의의와 실천 과제
고난받는 이웃과 함께하는 실천적 영성
스코필드 박사의 생애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고통받는 이웃의 곁을 지킨 성경적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그는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증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임을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현대 신앙인에게 그의 삶은 개인의 안락과 종교적 형식주의를 넘어 세상 속에서 공의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오늘의 신앙생활에 적용하기 위한 실천 기준
스코필드 박사의 신앙 유산을 일상에서 이어가기 위해서는 주변의 약자와 억울한 이웃에게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용기와 자신이 가진 전문성을 공공의 유익을 위해 나누는 헌신이 요구됩니다.
작은 자리에서도 부조리에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일상적 실천이야말로 그가 남긴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는 참된 방법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선교사가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1.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과 뜻을 같이하여 일제의 탄압 실상을 직접 촬영하고 해외에 적극적으로 알렸기 때문입니다. 비폭력 독립운동에 동참하고 옥중 수감자들을 돌본 그의 공로를 기려 한국인들이 붙여준 명예로운 호칭입니다.
Q2. 스코필드 박사가 남긴 제암리 학살 사건 기록의 역사적 가치는 무엇인가요?
A2. 일제가 은폐하려 했던 교회 방화 및 민간인 학살 현장을 직접 방문하여 현장 사진과 주민 증언을 담은 객관적인 보고서로 완성했다는 점입니다. 이 기록은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 자료가 되었습니다.
Q3. 스코필드 박사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A3. 한국의 독립과 인권 회복, 그리고 전후 교육과 빈민 구제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고인의 유언에 따라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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