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생애와 한국 근대사 및 교회사적 의의

한국 근대 교회사와 교육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한국명 원두우) 선교사입니다. 그는 19세기 말 조선의 닫힌 문이 열리던 시기에 입국하여 복음 전파뿐만 아니라 근대식 교육, 의료, 한글 문서 선교 등 다방면에서 깊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당시 조선은 정치적 격변과 외세의 압력 속에서 큰 혼란을 겪고 있었으며, 백성들의 삶 또한 매우 피폐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펼친 사역은 단순한 종교적 전도를 넘어 한국 근대 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본 글에서는 그의 입국 배경과 생애, 주요 사역의 구체적 성과, 그리고 교회사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입국 배경과 초기 사역의 전개 과정

선교지 지망과 1885년 조선 입국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주한 뒤, 뉴욕 대학교와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졸업하며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당초 그는 인도 선교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아직 개신교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은둔의 나라 조선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선교 방향을 전환하였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파송을 받은 그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미 감리회의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선교사 부부와 함께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으나 여전히 기독교의 공개적인 포교는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언더우드는 초기부터 직접적인 노방 전도를 하기보다는 의료와 교육 등 간접적인 섬김 사역을 통해 조선 사회와 신뢰를 구축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제중원 협력과 초기 신앙 공동체 형성

입국 직후 언더우드는 알렌(Horace N. Allen) 선교사가 고종의 윤허를 받아 설립한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 ‘제중원(광혜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고 진료를 도왔습니다. 그는 의료 사역에 협력하며 조선어 습득에 매진하였고, 점차 민중들과의 접점을 넓혀 나갔습니다.

공개 전도가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관심을 보인 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1886년 7월에는 한국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수례자 중 한 명인 노도사(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후 1887년 9월, 언더우드는 자신의 사저에서 14명의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며 정동교회(현재의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조직된 장로교회로, 이후 전국적인 교회 개척 운동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교육·문서·성경 번역 사역을 통한 근대화 기여

근대 고등 교육의 기틀과 연희전문학교 설립

언더우드는 조선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선교와 사회 발전의 핵심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1886년 고아들을 위한 구제 기관이자 초등 교육 기관인 ‘언더우드 학당(경신학교의 모태)’을 설립하여 근대식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교육적 비전은 중등 교육에 머물지 않고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고등 교육 기관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교파를 초월한 연합 대학을 세우기 위해 미국과 조선을 오가며 기금을 모으고 선교부를 설득했습니다.

마침내 1915년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YMCA)에서 ‘조선기독교대학(Chosun Christian College)’으로 첫 수업을 시작하였고,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이 학교는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모태가 되어 수많은 민족 지도자와 지식인을 배출하는 산실이 되었습니다.

한글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을 통한 문서 선교

언더우드는 일반 백성들이 이해하기 쉬운 한글을 활용하여 지식을 보급하고 성경을 전달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당시 양반 계층 중심의 한문 문화에서 벗어나, 소외된 계층과 여성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순한글 문서의 가치를 일찍이 간파했습니다.

그는 1887년 결성된 성경번역위원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 마태복음, 마가복음 등 단편 복음서와 신약성경 전체를 우리말로 완역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또한 1890년에는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영한사전인 《한영자전(A Concise Dictionary of the Korean Language)》과 문법서인 《한국어 문법(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Spoken Language)》을 출간했습니다. 이는 초기 외국인 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뿐만 아니라 한국어 연구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학술적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남긴 교회사적 유산과 평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의 도입과 자립 교회 육성

언더우드는 1890년 중국에서 사역하던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 선교사를 초청하여 조선 선교 현장에 맞는 선교 방법론을 정립했습니다. 이른바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자립(Self-supporting), 자치(Self-governing), 자전(Self-propagating)을 3대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외국 선교부의 재정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 현지인 성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짓고 복음을 전하며 운영하도록 유도한 정책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이 원칙을 충실히 실행하여 조선인 신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가도록 독려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적 기반 덕분에 한국 장로교회는 외세의 간섭에 휘둘리지 않고 단기간에 민족 자립형 신앙 공동체로 급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 약자 배려와 민족 수난기의 연대

언더우드는 조선의 전통적인 신분 제도와 성별 차별을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와 학교에서는 양반과 천민,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대우받았으며, 이는 봉건적 사회 질서를 근대적 평등 사회로 전환하는 데 일조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 직후 불안에 떨던 고종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선교사 동료들과 함께 황제의 침전을 밤낮으로 지키기도 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시기에도 한국 민족의 자주성과 평화를 지지하며 끝까지 곁을 지켰습니다. 오랜 과로와 질병으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1916년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던 중 소천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1999년 한국으로 이장되어 서울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한국의 교육과 의료 발전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A1. 두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같은 배를 타고 입국한 초기 선교 동역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차이점은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새문안교회와 연희전문학교를 세웠고, 아펜젤러는 미 감리회 소속으로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각 교단의 선교 기틀을 닦았습니다.

Q2. 언더우드 선교사가 편찬한 한영자전은 어떤 역사적 가치를 지니나요?

A2. 1890년에 출간된 《한영자전》은 서양인이 쓴 최초의 근대식 한영 및 영한 사전 중 하나입니다. 당시 일상에서 쓰이던 조선어를 음운과 어휘별로 정밀하게 기록하여, 초기 선교사들의 소통을 돕고 한국어 근대화 과정에 기여한 학술적 문헌입니다.

Q3. 언더우드 가문은 1대 선교사 이후 어떻게 한국을 섬겼나요?

A3. 장남인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은 연희전문학교 교장으로 헌신했고, 3대 원일한(Horace Grant Underwood II)은 6·25전쟁 참전 및 연세대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4대 원한광(Horace Horton Underwood Jr.) 역시 교수로 재직하며 4대에 걸쳐 100년 넘게 한국의 교육과 사회 발전에 공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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