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역사에서 성경이 오늘날처럼 많은 사람의 손에 쥐어지기까지는 수많은 학자와 교부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초에 활동한 교부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라틴어 정식 명칭은 에우세비우스 소프로니우스 히에로니무스)는 라틴어 성경 번역을 통해 서방 교회 역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입니다.
히에로니무스는 당대 최고의 고전 문학 지식과 탁월한 어학 실력을 갖춘 학자였으며, 평생을 학문 연구와 수도 생활에 바쳤습니다. 그가 완성한 라틴어 번역 성경인 불가타(Vulgata)는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유럽 교회의 표준 성경으로 사용되며 기독교 신학과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글에서는 히에로니무스의 생애와 배경, 불가타 성경 번역 과정에서 세운 학문적 원칙, 그리고 교단별 평가와 현대 신앙인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에로니무스의 생애와 학문적 배경
히에로니무스는 대략 347년경 달마티아(오늘날의 크로아티아 또는 슬로베니아 국경 인근)의 스트리돈이라는 도시에서 기독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며, 당대 최고의 교육 도시였던 로마로 유학을 떠나 문법과 수사학을 깊이 공부했습니다.
로마에서 그는 키케로나 베르길리우스 같은 고대 로마의 고전 작가들의 글을 탐독하며 수준 높은 라틴어 문장력을 체득했습니다. 그러나 세속 학문의 화려함 속에서도 신앙적 갈망을 놓지 않았던 그는 로마 체류 후반기에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은수 생활과 히브리어 학습
세례를 받은 히에로니무스는 세속의 유혹을 벗어나 철저한 신앙 훈련을 쌓기 위해 동방으로 떠났습니다. 그는 시리아 안티오키아를 거쳐 칼키스 사막으로 들어가 은수자(고독하게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는 수도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사막에서의 은수 생활은 육체적으로 매우 고되었으나, 학문적으로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잡념을 물리치고 영적인 훈련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 유대인 개종자에게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대 서방 교회의 지식인 대부분이 그리스어에만 익숙하고 히브리어에는 무지했던 점을 고려할 때, 히에로니무스의 히브리어 습득은 훗날 성경 번역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기초가 되었습니다.
교황 다마수스 1세와의 만남과 번역 의뢰
382년경 로마로 돌아온 히에로니무스는 뛰어난 학식과 어학 능력을 인정받아 당시 교황 다마수스 1세의 비서로 발탁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와 서방 교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초기 라틴어 성경(Vetus Latina) 번역본들이 혼용되고 있었는데, 번역의 질이 균일하지 않고 필사 과정에서의 오류가 많아 혼란이 가중되던 상황이었습니다.
교황 다마수스 1세는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히에로니무스에게 공식적인 라틴어 복음서 개정 작업을 정식으로 요청했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신뢰할 만한 그리스어 사본들을 대조하여 복음서 개정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이는 훗날 성경 전체를 라틴어로 새롭게 번역하는 대규모 작업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불가타(Vulgata) 성경 번역의 과정과 원칙
다마수스 1세 교황이 선종한 후, 히에로니무스는 386년경 팔레스타인의 베들레헴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는 그곳에 남녀 수도원을 세우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4년 동안 성경 번역과 주석 집필에 전념했습니다.

불가타라는 명칭은 라틴어 ‘에디시오 불가타(Editio Vulgata)’, 즉 ‘대중적인 판본’ 또는 ‘보급형 판본’이라는 뜻에서 유래했습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겠다는 목표가 담긴 명칭입니다.
70인역(LXX)을 넘어 히브리어 원문(Hebraica Veritas) 추구
히에로니무스 이전의 구약 번역은 대부분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Septuaginta)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대다수 교부들은 70인역 자체도 영감된 권위 있는 텍스트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에로니무스는 구약 성경이 원래 기록된 히브리어 원문 텍스트의 진실성, 즉 ‘헤브라이카 베리타스(Hebraica Veritas)’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번역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현지 유대인 랍비들과 교류하며 히브리어 본문의 본래 의미와 문법 구조를 철저하게 검토했습니다.
이러한 접근법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으며, 동시대의 위대한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마저도 교회의 일치와 전통적인 70인역의 권위를 우려하여 편지로 신중한 접근을 권고했을 정도로 큰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직역과 의역의 균형을 맞춘 번역 원칙
히에로니무스는 성경을 번역할 때 맹목적인 기계적 직역을 피하고, 원문의 뜻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라틴어 문맥에 맞게 전달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는 “단어가 아닌 의미를 번역해야 한다”는 원칙을 기본으로 삼았으나, 신학적으로 중요한 단어에 대해서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충실히 살리고자 노력했습니다.
- 원문 존중: 구약은 히브리어(일부 아람어) 원문에서, 신약은 권위 있는 그리스어 사본에서 직접 번역했습니다.
- 언어의 명확성: 고전 라틴어의 지나치게 수사학적인 표현을 피하고, 당대 대중이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는 명료한 문체를 사용했습니다.
- 정경과 외경의 구분: 히브리어 원문이 존재하는 성경만을 정경(Canon)으로 분류하고, 그리스어 본문으로만 전해지는 책들은 신앙의 덕을 세우기 위해 읽을 수는 있으나 교리를 확정하는 권위로는 삼을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교회사적 영향력과 교단별 관점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 성경은 완성 직후 곧바로 모든 교회의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익숙한 옛 번역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반발과 비판도 거셌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학문적 정확성과 문체적 우수성이 입증되면서 서유럽 전역의 표준 성경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이 성경은 중세 유럽의 공용어였던 라틴어 문화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었으며, 종교개혁 시기까지 교회의 전례, 신학 연구, 예술, 법률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평가 및 차이점
히에로니무스의 작업과 불가타 성경에 대한 평가는 서방 기독교 전통 내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