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윌리엄스코필드 선교사의 생애와 3·1운동 역사적 발자취 총정리

한국 근현대 교회사와 독립운동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외국인 선교사가 있습니다. 바로 캐나다 장로회 선교사이자 수의학자였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한국명 석호필·石虎弼, 1889~1970) 박사입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이 땅을 찾아와 고통받는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고, 1919년 3·1운동의 현장을 카메라와 기록물에 담아 일제의 무력 탄압을 전 세계에 폭로했습니다.

본 글에서는 역사적으로 검증된 공문서 및 사료를 바탕으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의 생애 전반, 3·1운동 당시의 구체적인 활동, 해방 후 한국 사회를 향한 헌신,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시민들이 되새겨야 할 신앙적·역사적 교훈을 심층적으로 살펴봅니다.

1.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생애와 내한 배경

스코필드 박사는 1889년 영국 워릭셔(Warwickshire)의 신앙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팔과 다리에 지체 장애를 갖게 되었으나, 역경 속에서도 깊은 신앙심과 학구열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의 역경과 학문적 성취

1907년 청년 스코필드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캐나다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학비를 벌며 토론토 대학교 오타와 수의과대학(Ontario Veterinary College)에 진학해 수의병리학을 전공했습니다. 1910년 졸업과 함께 수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토론토 대학교와 온타리오 농과대학 등에서 세균학 및 병리학 연구를 이어가며 촉망받는 학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연구 윤리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청지기로 살겠다는 신앙적 고백이 그의 학문적 태도를 지탱했습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초빙과 선교사 파송

스코필드 박사의 한국 방문은 우연이 아닌 선교적 부르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설립자 올리버 알 에비슨(Oliver R. Avison) 박사가 스코필드 박사에게 세브란스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쳐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스코필드는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The Foreign Mission Board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Canada)의 정식 의료 선교사로 임명받아 1916년 11월 부인 알리스 스코필드와 함께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그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 강의를 맡아 조선인 의학도들을 성심껏 양성했습니다. 또한 성경 강독반을 개설하여 기독교 복음과 정의, 평등의 가치를 전파했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그의 이름(Schofield)과 발음이 유사하면서도 성품을 드러내는 한국식 이름 ‘석호필(石虎弼)’을 지어주었습니다. 여기에는 ‘돌 같은 굳은 의지로 호랑이처럼 당당하게 약자를 돕는다’는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습니다.

2.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의 기록 및 세계 폭로

1919년 일어난 3·1 독립만세운동은 스코필드 박사의 삶에 중대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단순한 외국인 관찰자에 머물지 않고 식민 지배의 잔혹상을 객관적 사실로 기록하는 증언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탑골공원과 서대문형무소의 증언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과 청년 학생들의 만세 시위 계획을 사전에 감지했던 스코필드는 사진기를 들고 탑골공원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독립선언서 낭독 현장과 태극기를 들고 평화 시위를 벌이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습니다.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체포되자, 스코필드는 영국 국적자라는 신분을 활용해 서대문형무소를 수시로 방문했습니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투옥된 여성 독립운동가들과 부상자들을 면회하고 고문 실태를 직접 조사했습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 소장과 일제 경무국 간부들을 만나 비인도적인 고문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강력히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제암리·수촌리 학살 현장 조사 및 보고서 작성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일제 군경에 의해 무고한 주민 20여 명이 학살당하고 마을 전체가 불타는 참극이 발생했습니다. 인근 수촌리에서도 대규모 방화와 폭행이 자행되었습니다.

사건 직후 소식을 접한 스코필드 박사는 4월 17일 홀로 자전거와 사진기를 챙겨 제암리 현장으로 급파되었습니다. 잿더미로 변한 교회 터와 마을 잔해, 검게 탄 희생자 유해, 가족을 잃고 오열하는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수집하고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이 기록은 훗날 『제암리 학살 보고서(The Massacre of Chai-Amm-Ni)』라는 제목의 공식 보고서로 집필되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의 구체적인 조사 및 폭로 실행 순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현장 잠입 및 증거 수집: 일제 헌병의 감시망을 뚫고 제암리와 수촌리에 방문해 파괴 현장을 정밀 촬영하고 생존자 구술 청취
  • 객관적 보고서 작성: 감정적 주장을 배제하고 일시, 장소, 피해자 수, 물리적 탄압 양상을 수의학자 특유의 정밀한 관찰력으로 문서화
  • 해외 언론 및 외교관 전달: 보고서와 사진 원본을 서울 주재 미국 영사관, 캐나다 및 미국 언론사에 비밀리에 송부
  • 일제 수뇌부 대면 항고: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과 정무총감 등을 찾아가 만행을 엄중히 규탄하고 재발 방지 촉구
  • 국제 학술지 및 저서 발표: 1919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극동선교사대회에서 참상을 폭로하고, 1920년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ed Fire)』을 발간해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고발

일제는 스코필드 박사를 눈엣가시로 여겨 암살 위협과 미행을 일삼았고, 마침내 1920년 봄 선교사 계약 연장을 방해하여 그를 한국에서 강제 추방하듯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3. 광복 후 귀환과 사회적 약자를 위한 헌신

캐나다로 돌아간 스코필드 박사는 온타리오 수의과대학 교수로 복직하여 학문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는 1920년대 초 곰팡이가 핀 클로버를 먹은 소가 피를 흘리며 죽는 현상을 연구하여 항응고 물질 발견의 결정적 단초(훗날 와파린 개발로 이어짐)를 마련하는 등 세계적인 학술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늘 한국을 향해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부임

1958년 8월, 대한민국 정부는 광복 13주년을 맞아 스코필드 박사를 국빈으로 초청했습니다. 이듬해인 1959년, 그는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예 영구 귀국하여 한국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병리학 초빙교수로 재직하며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연구실 바닥에서 숙식을 해결할 정도로 청빈하게 생활했으며, 자신의 급여와 해외에서 보내온 후원금을 모두 가난한 학생들의 장학금과 고아원 운영비로 사용했습니다.

부정부패 척결 비판과 약자를 향한 돌봄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도 예언자적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부정선거와 부패, 그리고 1960년대 군사정권의 민주주의 억압에 대해 일간지 기고문을 통해 가감 없이 비판했습니다. 권력 앞에서는 불의를 질타하는 호랑이 같았지만, 가난하고 병든 이웃 앞에서는 자애로운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서울 시내 보육원과 나환자촌(한센인 정착촌)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위로금을 전달하고 아이들의 학비를 지원했습니다. 그의 후원을 받아 학업을 마친 청년 중에는 정운찬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한국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4. 스코필드 박사가 남긴 신앙적 의미와 삶의 적용

스코필드 박사의 삶은 신앙이 개인의 내면적 평안이나 추상적인 교리에 갇히지 않고, 역사와 사회 속에서 불의에 저항하는 실천적 용기로 발현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스코필드 선교사의 신앙적 행동 판단 기준

스코필드 박사가 일제의 압제와 사회적 불의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확고한 성경적 판단 기준에 있었습니다.

  • 성경적 공의(Mishpat)의 실천: 미가서 6장 8절(“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의 말씀처럼, 약자가 고통받는 구조적 폭력에 침묵하는 것은 신앙의 왜곡임을 천명
  • 진실에 대한 엄격한 청지기 의식: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고난의 현장을 정밀하게 기록하여 증언하는 지적·도덕적 정직성 유지
  • 약자를 향한 무조건적 연대: 사회적 기득권층이 아닌 고아, 과부, 억압받는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편에 서는 성육신적 섬김
  • 권력 앞에서의 비타협적 태도: 정권이나 제도적 권위보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복음의 평화 가치를 상위에 두는 예언자적 저항

현대 그리스도인이 삶에 적용할 실천 점검 사항

그의 삶을 오늘날 우리의 일상과 신앙생활에 비추어볼 때, 다음의 실천 지침들을 점검할 수 있습니다.

  • 신앙의 사회적 책임 감당하기: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주변의 소외된 이웃, 경제적 빈곤층, 사회적 참사 피해자들의 눈물에 공감하고 실질적인 나눔을 실천합니다.
  • 진실과 정직의 증인 되기: 가짜 뉴스와 왜곡된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 속에서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정직한 말과 기록을 남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 소명에 대한 청빈한 자세 견지: 물질적 풍요와 권력을 좇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직업적 전문성을 통해 공동체와 약자를 돕는 도구로 자신을 드립니다.
  • 차별과 편견을 뛰어넘는 포용: 인종, 국적, 신체적 조건을 떠나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며 고통의 현장에 함께 머무르는 연대의 삶을 훈련합니다.

1970년 4월 12일, 스코필드 박사는 81세를 일기로 서울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소천했습니다. 그는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묘비 번호 96번)에 그를 안장했습니다. 1968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스코필드 박사가 3·1운동의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공식적인 3·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33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코필드 박사는 거사 이전부터 독립운동가들과 긴밀히 교류하며 계획을 지지했고, 3·1운동 전 과정을 사진과 문서로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습니다. 이에 한국 사회와 역사학계는 그의 헌신과 독립운동에 대한 공헌을 기려 공식 서명자는 아니지만 ‘제34인’으로 예우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Q2. 스코필드 박사가 촬영한 제암리 학살 사건 사진들은 역사적으로 왜 중요한가요?

일제는 제암리 학살 사건 직후 민간인의 실수나 우발적인 소요 진압 중 발생한 사고로 은폐·축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스코필드 박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폐허가 된 교회 현장과 불탄 시신, 파괴된 가옥을 직접 촬영하여 날짜와 상황을 기록한 보고서를 남김으로써, 일제의 조직적 학살 만행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규명하는 반박 불가의 물증이 되었습니다.

Q3.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비교할 때 스코필드 박사 활동의 차별점은 무엇인가요?

당시 대다수 외국 선교부는 ‘정교분리 원칙’과 일제와의 마찰을 우려해 식민지 정치 상황에 대한 직접적 개입을 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반면 스코필드 박사는 약자의 고통과 불의에 침묵하는 것은 기독교적 사랑에 어긋난다는 신념 아래, 선교 본부의 제재와 일제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일제 총독을 직접 찾아가 면전에서 비판하는 등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저항 운동을 전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