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중반 이후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 희망봉 일대에 형성된 케이프 식민지는 유럽 무역선들의 단순한 보급 기지 역할을 넘어, 아프리카 남부 전역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중대한 지리적·역사적 거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기독교 역사는 유럽 제국주의 세력의 영토 확장 및 원주민 정책과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케이프 식민지와 남아프리카 개신교 선교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식민지 개척의 역사적 맥락, 실제 현장에 파송되어 헌신했던 개별 선교사들의 구체적인 사역, 그리고 복음 전파와 인권 옹호 사이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신학적·사회적 쟁점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케이프 식민지 형성과 초기 종교적 배경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얀 판 리베크(Jan van Riebeeck)가 이끄는 선단이 테이블만(Table Bay)에 도착하면서 케이프타운 일대에 정착촌이 건설되었습니다. 초기 정착 목적은 네덜란드와 동인도(인도네시아 일대)를 오가는 상선에 신선한 식수, 고기, 채소를 공급하는 항해 중간 기항지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초기 케이프 식민지의 공식 종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Nederduitse Gereformeerde Kerk, NGK)였습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식민지 주민들의 엄격한 종교적 규율을 요구했으며, 다른 개신교 교파나 종교의 공개적인 예배를 법적으로 제한했습니다. 초기 유럽 정착민들(보어인 또는 아프리카너)은 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칼뱅주의 전통을 따랐으나, 이 시기에는 토착 아프리카인(코이코이족, 산족)이나 노예들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복음 전도 사역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내 종교 상황은 18세기 중반 모라비안 교회의 진출과 19세기 초반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 점령(1795년 1차 점령, 1806년 최종 점령)을 거치면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지배가 확립되면서 다양한 개신교 선교단체들이 남아프리카로 유입될 수 있는 제도적 통로가 열렸습니다.
남아프리카 땅을 밟은 주요 개신교 선교사들의 사역
남아프리카 개신교 선교 역사는 막연한 단체 활동이 아니라, 척박한 환경 속에서 토착민의 영혼과 삶을 돌보았던 개별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발걸음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1. 조지 슈미트와 바비안스크루프(헤나덴달)의 모라비안 선교
남아프리카 토착민을 위한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는 모라비안 형제회(Moravian Church) 소속의 독일인 선교사 조지 슈미트(George Schmidt, 1709–1785)였습니다.
- 파송 및 사역 개시: 슈미트는 헤른후트(Herrnhut) 공동체의 파송을 받아 1737년 케이프타운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테이블만에서 동쪽으로 약 130km 떨어진 바비안스크루프(Baviaanskloof, 훗날 ‘은혜의 골짜기’를 뜻하는 ‘헤나덴달(Genadendal)’로 개칭)에 정착했습니다.
- 토착민과의 교제와 문자 교육: 그는 코이코이(Khoikhoi)족 원주민들에게 네덜란드어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고 성경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 갈등과 철수: 1742년 슈미트는 세례 교육을 이수한 코이코이족 개종자 5명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케이프타운의 네덜란드 개혁교회 성직자들은 정식 안수를 받지 않은 모라비안 평신도 선교사가 성례를 집례하는 것은 교회법 위반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결국 식민지 당국의 압박으로 슈미트는 1744년 유럽으로 강제 귀국해야 했습니다.
- 역사적 유산: 슈미트가 떠난 후에도 개종자 막달레나(Magdalena)를 비롯한 코이코이 신자들은 슈미트가 남겨준 네덜란드어 신약성경을 간직하며 신앙의 모임을 지켰습니다. 1792년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다시 헤나덴달을 방문했을 때, 노년이 된 막달레나는 가죽 주머니에 소중히 보관해 온 성경을 꺼내 보여주었으며, 이는 남아프리카 선교가 다시 본격화되는 감동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요하네스 판 데르 켐프와 인권 옹호
1799년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LMS)의 파송을 받아 케이프에 도착한 네덜란드 출신의 요하네스 판 데르 켐프(Johannes Theodorus van der Kemp, 1747–1811)는 네덜란드 명문 라이덴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습니다.
- 국경 지대 선교와 베델스도르프 설립: 그는 초기에는 동부 국경 너머 코사(Xhosa)족 왕 응키카(Ngqika)의 영토에서 사역을 시도했으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철수한 뒤, 알리고아만 근처에 ‘베델스도르프(Bethelsdorp)’ 선교 기지를 세웠습니다.
- 철저한 토착화와 제도적 저항: 판 데르 켐프는 원주민과 동일한 수준의 거친 옷을 입고 식사를 함께하며 철저하게 그들의 삶에 동화되었습니다. 나아가 식민지 농장주들이 코이코이족과 혼혈 노동자들을 학대하고 불법으로 노예화하는 관행을 법정에 고발하고 식민 정부에 지속적으로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그의 비타협적인 인권 옹호 활동은 정착민 사회로부터 극심한 반발과 증오를 샀지만, 토착민들에게는 교회가 단순한 지배자의 도구가 아님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3. 존 필립 박사와 ‘제50조 조례’
존 필립(John Philip, 1775–1851)은 1819년 런던선교회의 남아프리카 총괄 책임자로 부임하여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30년 넘게 사역했습니다.
- 원주민 법적 권리 투쟁: 필립은 복음 전도뿐만 아니라 법률과 제도의 개혁 없이는 원주민들이 온전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1828년 영국에서 『남아프리카 연구(Researches in South Africa)』를 출간하여 식민지 개척민들의 원주민 착취 실태를 폭로했습니다.
- 제50조 조례 통과: 필립과 영국 본토 인도주의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로, 1828년 케이프 식민지 당국은 ‘제50조 조례(Ordinance 50)’를 공포했습니다. 이 조례는 자유 유색인종과 코이코이족에게 백인과 동등한 토지 소유권, 통행증 없는 자유 이동권, 고용 계약의 법적 보호를 명문화한 획기적인 법안이었습니다.
4. 로버트 모펏과 쿠루만 선교 기지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버트 모펏(Robert Moffat, 1795–1883)은 1816년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파송되어 1821년 북부 내륙의 쿠루만(Kuruman)에 정착했습니다.

- 츠와나어 성경 번역과 활자 인쇄: 모펏은 현지 바츠와나(Batswana)족과 깊이 교제하며 그들의 언어인 세츠와나어(Setswana)를 체계적으로 습득했습니다. 그는 문자가 없던 언어를 라틴 문자로 표준화하고, 신구약 성경 전체를 세츠와나어로 번역하여 1857년 현지에 직접 들여온 인쇄기로 아프리카 대륙 최초의 전권 현지어 번역 성경을 인쇄·보급했습니다.
- 북부 내륙 선교의 교두보: 쿠루만 기지는 이후 로버트 모펏의 사위가 된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을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내륙 깊숙이 진출하는 결정적인 보급창이자 전초기지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선교 역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판단 기준
남아프리카의 개신교 선교 역사는 찬사와 비판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영역입니다. 이 시기를 단편적인 영웅주의나 단순한 제국주의 협력론으로 치부하지 않기 위해서는 균형 잡힌 역사적 평가 기준이 필요합니다.
- 복음의 본질과 서구 문화의 분리 여부: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이 순수한 성경적 신앙이었는지, 아니면 서구 유럽의 의복, 주거 양식, 농경 방식 등을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여 강요한 문화 제국주의적 요소가 섞여 있었는지를 구분하여 평가해야 합니다.
- 식민 당국의 정치적 권력과의 관계: 선교사들이 대영제국이나 식민 총독부의 영토 확장 정책 및 완충 지대 형성에 협력했는지, 아니면 제국주의 정책의 불의를 고발하고 원주민의 입장을 대변했는지를 사건별로 식별해야 합니다.
- 토착민 주체성의 인정 여부: 성경 번역과 문자 교육을 통해 현지인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영적·지적 자립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남아프리카 선교 연구 및 현장 접근의 실행 순서
남아프리카 초기 개신교 선교의 역사를 학술적으로 고찰하거나 선교 유적지를 답사하고자 할 때는 체계적인 순서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 식민지 지리 및 지형 파악: 케이프타운 테이블만에서 시작하여 바비안스크루프(헤나덴달), 동부 국경(그레이엄스타운, 베델스도르프), 그리고 북부 오렌지강 너머의 쿠루만으로 이어지는 지리적 이동 경로를 지도로 확인합니다.
- 선교회별 원천 문서 열람: 런던선교회(LMS) 기록보관소(영국 SOAS 대학 소장 문서), 헤른후트 모라비안 기록물, 남아프리카 국립도서관 고문서 자료를 통해 선교사들이 본국 본부에 보낸 공식 보고서와 개인 일기를 대조 분석합니다.
- 식민 당국 법률 문서 대조: 1809년의 통행증법(Hottentot Proclamation)과 1828년 제50조 조례, 1834년 노예 해방령 등 식민지 의회 법안의 개정 과정을 선교사들의 청원서와 나란히 분석합니다.
- 토착 구전 전통과 현지 교회사 청취: 선교사 시각의 기록뿐만 아니라, 코이코이족, 코사족, 츠와나족 후손들에게 전승된 구전 기록과 남아프리카 흑인 토착교회(African Initiated Churches)의 형성과정을 함께 살펴봅니다.
역사 연구 시 주의해야 할 예외와 왜곡의 오류
남아프리카 선교사를 연구할 때 범하기 쉬운 함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선교사 집단의 동질화 오류: 모든 선교사가 동일한 정치적 입장을 취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런던선교회 내부에서도 판 데르 켐프나 존 필립처럼 급진적으로 원주민 편에 선 인물이 있었던 반면, 백인 정착민의 이익을 적극 대변한 선교사들도 공존했습니다.
- 원주민을 수동적 수용자로만 보는 관점: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기독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무조건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전통적 세계관 속에서 성경의 메시지(특히 해방, 평등, 창조주 하나님의 공의)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능동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 시대착오적 단죄와 무비판적 정당화의 양극단: 18~19세기 인물들을 21세기의 고도화된 인권 기준이나 탈식민주의 이론만으로 전면 단죄하는 태도와, 선교사들의 명백한 인종적 편견과 문화적 우월주의를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무비판적으로 합리화하는 태도를 모두 경계해야 합니다.
남아프리카 개신교 선교 역사 핵심 점검 체크리스트
- [ ] 선교 이전 정착 배경: 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케이프 정착과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폐쇄적 종교 독점 상황을 이해했는가?
- [ ] 모라비안 선교의 시초: 조지 슈미트가 1737년 바비안스크루프(헤나덴달)에서 시작한 사역과 1742년 세례 갈등의 원인을 파악했는가?
- [ ] 인권과 제도의 개혁: 존 필립의 문서 활동과 1828년 ‘제50조 조례’ 제정이 원주민의 법적 권리에 미친 영향을 확인했는가?
- [ ] 문서 및 성경 번역: 로버트 모펏이 쿠루만에서 이룩한 세츠와나어 문자화와 전권 성경 번역의 의의를 인지했는가?
- [ ] 역사적 양면성 인식: 복음 전파의 영적 열매와 식민주의 제국 팽창 사이의 긴장 관계를 균형 있게 평가하고 있는가?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케이프 식민지 초기 네덜란드 정착민들은 왜 원주민 선교에 적극적이지 않았습니까?
초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상업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무역 거점을 운영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며, 원주민 선교는 회사의 주주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부차적인 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정착민들 사이에는 코이코이족을 ‘함의 후손’으로 보아 영적으로 교화되기 어렵다고 보거나,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노예나 노동자는 법적으로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는 교회법적 해석 때문에 경제적 손실을 우려하여 선교를 꺼리는 풍조가 만연했습니다.
Q2. 런던선교회 선교사들과 보어인(정착 농민)들의 갈등이 극심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어인 농민들은 원주민들을 가혹한 법률과 통행증 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대농장에 종속된 값싼 노동력으로 묶어두려 했습니다. 그러나 존 필립과 요하네스 판 데르 켐프 같은 런던선교회 선교사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식민 정부와 영국 의회에 로비하여 원주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제50조 조례’를 이끌어내자, 보어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생존권에 대한 침해로 받아들였고, 이는 1830년대 중반 보어인들이 영국 지배를 벗어나 북쪽 내륙으로 대거 이동한 ‘그레이트 트렉(Great Trek)’의 결정적인 동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Q3. 로버트 모펏의 쿠루만 선교는 현대 남아프리카 교회에 어떤 영향을 남겼습니까?
로버트 모펏이 쿠루만 기지에서 세츠와나어로 완성한 성경 번역은 단순한 종교 서적의 보급을 넘어, 남아프리카 흑인 민족 언어의 보존과 표준화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은 백인 사제의 중재 없이도 모국어로 기록된 성경을 직접 읽으며 하나님의 정의와 평등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에 맞서 비폭력 저항 운동을 전개하는 기독교적 영적 토양을 마련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