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교회사를 돌아볼 때 가장 큰 비극이자 동시에 깊은 성찰을 던져주는 사건 중 하나는 1930년대 나치 독일 체제 아래에서 일어난 교회의 분열과 저항입니다. 전체주의 독재 정권이 국가의 모든 영역을 장악해 가던 시기, 독일 개신교회 내부에서는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국가 권력에 맞선 신앙인들의 모임이 태동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백교회(Bekennende Kirche)’입니다. 고백교회가 어떤 역사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었는지, 당시 어떤 인물들이 신앙적 결단을 내렸는지,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 역사를 어떤 기준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체계적으로 살펴봅니다.
1. 나치 정권의 교회 장악 시도와 고백교회의 형성 배경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이 집권하면서 독일 사회 전반에는 ‘동일화(Gleichschaltung, 일체화)’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습니다. 이는 사법, 교육, 문화, 언론뿐 아니라 종교 기관까지 국가의 전체주의 이념 아래 종속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당시 독일 개신교(루터교, 개혁교회, 연합교회)는 역사적으로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정치 권력의 침투에 매우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독일 기독교인(독신의 기독교인) 운동의 등장
나치 이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던 개신교 내부 세력은 스스로를 ‘독일 기독교인(Deutsche Christen)’이라 칭하며 세력을 급격히 확장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과 나치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이념을 결합하고자 했습니다.
- 구약성경이 유대인의 책이라는 이유로 정경 목록에서 배제하려 시도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이 아닌 아리아인 영웅으로 왜곡하여 묘사했습니다.
- 교회 내에 나치의 ‘아리아 인종 조항(Arierparagraph)’을 도입하여, 유대인 혈통을 가진 목회자와 성도를 직분과 공동체에서 추방하려 했습니다.
- 개별 영방교회 체제를 해체하고, 히틀러를 지지하는 루트비히 뮐러(Ludwig Müller)를 ‘제국주교(Reichsbischof)’로 세워 단일화된 제국교회(Reichskirche)를 수립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와 신앙고백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행위였습니다. 교회 안팎에서는 교회의 머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지키기 위해 저항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사 분석을 위한 신앙적 판단 기준
교회 역사학자들과 신학자들은 당시 독일 교회의 대응을 평가할 때 다음과 같은 객관적 기준을 적용합니다.
- 복음의 배타적 절대성 유지 여부: 국가 권력이나 특정 이념을 하나님의 말씀과 대등하거나 상위의 위치에 두었는지 판단합니다.
- 성경의 온전성 수호: 특정 정치 세력의 기호에 맞추어 성경의 일부(구약성경 등)를 임의로 왜곡하거나 삭제하지 않았는지 검토합니다.
- 교회의 본질적 독립성: 국가 행정 조직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지 않고, 성례와 설교의 순수성을 보존했는지 확인합니다.
- 인종주의 배격과 약자 연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부정하는 인종 분리주의 정책에 명확히 반대했는지를 살핍니다.
2. 저항의 구체화: 목사긴급동맹에서 바르멘 신학선언까지
국가의 압박이 가중되자 참된 신앙고백을 수호하려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점진적인 단계로 저항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이들의 행보는 단순한 정치 운동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 이유를 다시 세우기 위한 신학적 행동이었습니다.
저항 공동체의 단계별 실행 순서
고백교회의 태동과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 목사긴급동맹(Pfarrernotbund) 결성 (1933년 9월)마르틴 니묄러 목사를 중심으로 약 2,000여 명의 목회자가 모여 나치의 ‘아리아 조항’을 거부하는 서약 운동을 시작했습니다.성경과 종교개혁 신앙고백에 어긋나는 국가의 간섭에 응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했습니다.
- 제1차 바르멘 총회 개최 (1934년 5월)루터교, 개혁교회, 연합교회 대표들이 독일 부퍼탈의 바르멘에 모여 전국적인 신앙대회를 열었습니다.카를 바르트 교수가 초안을 작성한 역사적인 ‘바르멘 신학선언(Barmen Declaration)’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 고백교회의 독자적 지도부 수립 (1934년 10월 다렘 총회)나치에 굴복한 공식 제국교회 지도부를 비합법적인 거짓 교회로 규정했습니다.참된 교회를 대변하는 독자적인 ‘비상 교회 지도부’를 결성하고, 자체적인 목회자 안수와 신학교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 지하 활동과 불복종 운동의 전개 (1935년 이후)게슈타포의 감시와 탄압이 강화되자 핑켄발데 등지에서 비밀 지하 신학교를 운영하며 복음적 목회자를 양성했습니다.정권의 불의와 유대인 박해에 대해 공적 회람과 설교를 통해 경고하는 신앙적 불복종을 이어갔습니다.
바르멘 신학선언 제1조의 핵심
바르멘 선언은 총 6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조항마다 성경 구절, 긍정 명제(우리가 고백하는 진리), 부정 명제(우리가 거부하는 오류)를 대조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특히 제1조는 고백교회의 신학적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들어야 하며, 삶과 죽음 속에서 신뢰하고 순종해야 할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교회가 선포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이 유일한 말씀 외에, 그리고 그 말씀과 나란히 또 다른 사건들과 권세들, 형태들과 진리들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할 수 있고 인정해야 한다는 거짓 교리를 배격한다.” (요한복음 14:6, 요한복음 10:1-9 근거)
이 선언을 통해 고백교회는 히틀러의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나 민족적 신화를 하나님의 계시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모든 시도를 명백한 우상숭배로 규정했습니다.
3. 고백교회를 이끈 주요 인물들의 생애와 선택
고백교회의 역사는 교리적 문서에 머물지 않고, 불의한 시대 속에서 자신의 삶을 던져 진리를 증언한 인물들의 결단을 통해 구체화되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디트리히 본회퍼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촉망받는 신학자였습니다. 1933년 히틀러 집권 직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지도자(Führer)’가 우상이 될 때 그는 ‘유혹자(Verführer)’가 된다고 경고하며 일찍부터 나치즘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 핑켄발데 지하 신학교 운영: 고백교회의 목회자 후보생들을 양성하기 위해 공동체 생활과 기도, 말씀 묵상 중심의 영성 훈련을 이끌었습니다. 이 경험은 그의 저서 《신도의 공동생활》에 잘 담겨 있습니다.
- ‘값싼 은혜’에 대한 경고: 참된 제자도와 회개 없이 안일한 위로만을 구하는 신앙을 비판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값비싼 은혜’의 회복을 촉구했습니다(《나를 따르라》).
- 행동하는 신앙: 단순한 종교적 수사를 넘어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직접 행동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미친 사람이 모는 자동차가 보행자들을 치고 지나갈 때, 목사의 임무는 희생자의 장례를 치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차의 바퀴에 뛰어들어 굴러가는 바퀴를 멈추는 것이다”라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 순교: 군 정보국(Abwehr) 내 반나치 저항 세력과 연대하여 유대인 탈출을 돕고 정권 전복 활동에 관여하다 체포되었으며, 종전을 불과 3주 앞둔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마르틴 니묄러 (Martin Niemöller, 1892–1984)
마르틴 니묄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해군의 U보트 잠수함 함장으로 복무했던 참전 용사이자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목회자였습니다. 집권 초기에는 히틀러가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아 줄 것으로 기대하기도 했으나, 나치가 기독교의 본질을 침해하고 교회를 어용화하려 하자 가장 단호한 반대자로 돌아섰습니다.
- 목사긴급동맹 주도: 국가의 강요에 침묵하지 않고 목회자들이 연대하여 아리아 조항에 반대하도록 이끌었습니다.
- 체포와 수용소 수감: 히틀러와의 직접 면담에서도 신앙의 원칙을 굽히지 않았으며, 1937년 체포되어 작센하우젠과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히틀러의 ‘개인 수감자’로 8년 동안 투옥되었습니다.
- 종전 후 참회 운동: 전쟁이 끝난 후 독일 교회가 침묵했던 책임을 통감하고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1945년)’을 이끌어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시적 참회록은 오늘날까지도 방관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문구로 널리 인용됩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들이 유대인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그들이 나를 덮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카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스위스 출신의 개혁교회 신학자로, 당시 독일 본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었습니다. 20세기 신학의 흐름을 바꾼 그는 고백교회의 신학적 기초를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 인간 중심 신학에 대한 반대: 인간의 문화, 역사, 민족성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올려놓는 자유주의 신학의 취약점을 비판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만을 강조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전개했습니다.
- 바르멘 선언 작성: 국가나 민족 이데올로기가 결코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성경적으로 논증하는 선언문을 기초했습니다.
- 원칙적 저항과 추방: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 선서를 거부하여 결국 대학교수직을 박탈당하고 1935년 스위스로 추방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국외에서 독일 고백교회를 신학적으로 계속 지원했습니다.
4. 고백교회 역사 해석 시 주의할 한계와 예외적 사실들
역사를 균형 있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고백교회의 성과뿐 아니라 그들이 지녔던 한계와 시대적 제약도 객관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후대의 시선으로 과거를 이상화하면 실제 역사가 주는 교훈을 온전히 얻기 어렵습니다.
주의해야 할 역사적 사실과 예외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 왜곡하기 쉬운 부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정치적 반체제 운동과의 구분: 고백교회는 처음부터 나치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출범한 ‘정치 혁명 단체’가 아니었습니다. 본질적으로는 국가의 부당한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교리와 신앙의 자유를 지키려 했던 ‘교회 내 신앙 수호 운동’이었습니다. 본회퍼처럼 적극적인 정치적 저항으로 나아간 인물은 고백교회 내부에서도 소수에 해당했습니다.
- 유대인 박해에 대한 전반적 대응의 한계: 고백교회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계 그리스도인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보호하는 일에는 확고한 입장을 취했으나, 비기독교인 유대인 전체를 향한 나치의 조직적 학살(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교단 차원에서 일치된 공개 항의를 조직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성은 전후 독일 교회의 중요한 신학적 과제가 되었습니다.
- 내부 노선의 갈등: 고백교회는 단일한 생각만을 가진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타협을 피하고 전면적 불복종을 주장한 ‘다렘파(급진파)’와, 주정부와의 부분적 타협을 통해 교회의 행정적 존속을 도모하려 했던 보수파 영방교회 주교들 사이에 상당한 갈등과 분열이 존재했습니다.
- 독일 민족주의 정서와의 복합적 관계: 많은 고백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1930년대 초반 베르사유 조약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독일의 애국주의적 열망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의 저항은 ‘국가 사랑’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국가가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행위’를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고백교회와 공식 독일 제국교회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A1. 제국교회(독일 기독교인 세력 중심)는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보냄받은 지도자로 추앙하며 기독교 신앙을 나치 이념에 맞추어 변질시켰습니다. 반면 고백교회는 성경과 전통적 신앙고백을 기반으로 삼아,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며 어떠한 정치 지도자나 국가 권력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없음을 천명했습니다.
Q2. 당시 가톨릭교회는 나치 정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나요?
A2. 로마 가톨릭교회는 1933년 바티칸과 나치 정부 간의 정교조약(Reichskonkordat)을 체결하여 가톨릭 학교와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는 대신 성직자의 정치 활동을 제한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나치가 협약을 지속적으로 위반하자 1937년 교황 비오 11세는 독일어로 된 회칙 《극심한 우려로(Mit brennender Sorge)》를 발표하여 나치의 인종주의와 국가 숭배를 비판했습니다. 다만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체제 전복적인 저항보다는 교회의 기득권과 신앙생활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Q3. 바르멘 신학선언은 오늘날 현대 교회에 어떤 의의를 주나요?
A3. 바르멘 선언은 교회가 시대의 이념, 정치적 흐름, 세속적 가치관에 매몰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바로 서야 함을 일깨워 줍니다. 교회가 세상 권력에 편승하여 복음의 진리를 타협할 때 교회의 정체성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반대로 순수한 신앙고백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결단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지침서 역할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