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대항해시대의 물결 속에서 동아시아로 복음을 전하고자 떠난 예수회 창립 회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1552)의 여정은 교회사 선교 역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으로 평가받습니다. 하비에르는 포르투갈의 동인도 무역 항로를 따라 인도 서해안 고아에 도착한 후, 동남아시아 교역의 중심지였던 말라카를 거쳐 유럽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일본 열도에 상륙하여 기독교 신앙을 전했습니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이동을 넘어,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세 지역에서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사용한 선교 전략의 변화 과정이었습니다. 인도의 하층민 공동체 사목에서 출발하여 동남아시아의 다문화 교역항을 거치고, 최종적으로 일본의 유교·불교 지식인 계층과의 철학적 변증으로 나아간 하비에르의 선교 발자취를 역사적 사실과 신학적 배경을 중심으로 상세히 살펴봅니다.
1.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파견 배경과 대항해시대 선교 환경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사역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16세기 당시 유럽의 종교적 상황과 정치·해양 팽창의 구조를 함께 파악해야 합니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는 내부 쇄신과 영적 갱신을 도모했으며, 이 과정에서 1534년 이냐시오 데 로욜라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비롯한 7명의 파리 대학교 동료들이 예수회(Societas Iesu)를 창설했습니다. 예수회는 교황에 대한 순명 서원과 엄격한 영신수련, 그리고 국경을 넘어서는 선교 열정을 핵심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은 교황청으로부터 ‘파드로아두(Padroado, 포르투갈 보호권)’ 체제를 부여받았습니다. 이는 포르투갈 국왕이 아시아 항로 개척과 무역 독점권을 갖는 대가로, 해당 영토와 거점 기지 내에 성당을 짓고 사제를 파견하며 교구를 유지하는 재정적·행정적 책임을 지는 제도였습니다.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는 아시아 식민 거점에 파견할 선교사를 교황청과 예수회에 요청했고, 이에 하비에르가 교황 특사(Apostolic Nuncio) 자격으로 임명되어 1541년 4월 리스본을 출항하여 1년여의 항해 끝에 1542년 5월 인도 고아에 도착했습니다.
이러한 파견 구조는 하비에르에게 안정적인 이동 수단과 군사적 보호를 제공했으나, 동시에 선교 활동이 포르투갈 상인들의 식민 지배 및 경제적 착취와 얽히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하비에르는 이 긴장 관계 속에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현지 주민들을 돕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2. 지역별 선교 활동의 전개와 핵심 방식
하비에르가 머물렀던 인도, 말라카, 일본은 각각 종교적 전통, 사회 구조, 정치적 통치 형태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각 현장의 상황에 맞춰 선교 전략을 단계적으로 수정해 나갔습니다.
2.1 인도(고아와 어부 해안): 기초 교리 교육과 하층민 사목
하비에르가 첫발을 디딘 고아(Goa)는 포르투갈령 인도의 총독부가 있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하비에르는 고아에 정착하자마자 관료나 군인들의 환대를 누리기보다, 시내 병원과 감옥을 방문해 환자들을 간호하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종을 들고 고아 시내 골목을 다니며 아이들과 노예들을 불러 모아 주기도문, 성모송, 십계명, 사도신경을 가르쳤습니다.
이후 그는 인도 최남단의 어부 해안(피셔리 코스트, Fishery Coast)으로 이동하여 하층민인 파라바스(Paravas) 족을 대상으로 사역했습니다. 파라바스 족은 진주 채취에 종사하던 카스트 하층민으로, 이미 이슬람 세력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포르투갈의 보호를 받으며 집단 세례를 받았으나 실질적인 기독교 신앙 교육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 모국어 교리서 번역과 암송: 하비에르는 현지 통역관들의 도움을 받아 필수적인 기도문과 교리 문답을 현지 언어인 타밀어로 번역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주민들을 위해 교리 내용을 단순한 운율에 맞춰 노래(찬미가) 형태로 암기하도록 지도했습니다.
- 순회 사목 체계 구축: 하비에르는 30여 개에 달하는 어촌 마을을 직접 도보로 순회하며 병자를 위해 기도하고 유아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본인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더라도 신앙이 유지될 수 있도록 각 마을마다 현지인 평신도 지도자(카테키스트)를 세워 교리 교육과 공동 기도를 주도하게 했습니다.
- 식민지 관료들의 부패 규탄: 하비에르는 현지 주민들을 수탈하고 부도덕한 삶을 살던 포르투갈 관리와 상인들의 행태를 엄격하게 비판했으며, 주앙 3세 국왕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공정한 통치와 선교 지원을 촉구했습니다.
2.2 말라카(동남아시아 거점): 다문화 교역항 사목과 동아시아 선교의 연결고리
1545년 9월, 하비에르는 동남아시아 해상 무역의 요충지인 말라카(현재의 말레이시아 믈라카)에 도착했습니다. 말라카는 인도, 아랍, 중국, 류큐(오키나와), 동남아 각지의 상인들이 교차하는 국제 무역 도시였습니다.
말라카에서 하비에르는 주로 병원 사목, 포르투갈 상인들의 신앙 재교육, 그리고 항구를 오가는 다국적 선원들에 대한 복음 전파에 힘썼습니다. 또한 1546년부터 1547년 사이에는 인도네시아 동부의 몰루카 제도(암본, 테르나테 등 향료 제도)로 건너가 고립된 군도 지역의 기독교 공동체를 순방하며 신앙을 굳건히 다졌습니다.
무엇보다 말라카는 하비에르의 사역 지평을 일본으로 확장시킨 결정적 장소였습니다. 1547년 12월, 하비에르는 말라카에서 포르투갈 상인 호르헤 알바레스의 소개로 ‘안지로(Anjiro, 세례명 파울로 데 산타페)’라는 이름의 일본인 망명자를 만났습니다. 살인 혐의로 고향 가고시마를 떠나 도피 중이던 안지로는 하비에르와의 대화를 통해 깊은 영적 참회를 경험하고 기독교 교리를 진지하게 탐구했습니다. 하비에르는 안지로의 지적 수준, 정중한 예절, 그리고 일본 사회의 문화적 특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일본이야말로 복음의 씨앗이 깊이 뿌리내릴 수 있는 옥토라고 판단하여 일본 선교를 본격적으로 결심하게 됩니다.
2.3 일본(가고시마·야마구치·교토): 문화 적응주의 선교와 지식인 계층과의 대화
1549년 8월 15일, 하비에르는 동료 선교사 코스메 데 토레스(Cosme de Torres), 후안 페르난데스(Juan Fernández), 그리고 기독교 신자로 세례를 받은 안지로 일행과 함께 일본 규슈 남단의 가고시마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센고쿠 시대) 말기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각 지역 다이묘(영주)들이 할거하던 분열기였습니다.
하비에르는 이전 인도나 동남아시아에서 사용했던 하층민 중심의 단순 교리 암송 방식이 일본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즉각 인식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사변적 철학, 논리적 토론, 높은 수준의 도덕 규범을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비에르는 선교 전략을 전면 수정했습니다.
- 다이묘와의 공식 접견과 서구 문물 증정: 가고시마 영주 시마즈 다카히사, 야마구치 영주 오우치 요시타카 등을 차례로 접견했습니다. 초기에 청빈을 강조하며 남루한 수도복 차림으로 교토(당시 수도)를 방문했다가 천황과 쇼군을 알현하지 못하고 실패를 겪은 후, 하비에르는 접근 방식을 바꿨습니다. 야마구치로 돌아와 정중한 외교관 복장을 갖추고 시계, 오르골, 망원경 등 서양의 진귀한 문물을 선물로 증정함으로써 다이묘의 환대를 받고 공식적인 선교 허가를 취득했습니다.
- 불교 승려들과의 신학·철학 논쟁: 하비에르는 선종 사찰을 방문해 승려들과 우주 창조의 원인, 인간 영혼의 불멸성, 악의 기원, 구원의 조건 등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불교 철학의 공(空) 사상이나 다신론적 세계관에 맞서 유일신론적 창조주 신앙을 논리적으로 변증했습니다.
- 번역 용어의 정비와 토착화의 한계 극복: 초기 안지로의 도움으로 번역할 때, 일본어 ‘다이니치(大日如来, 대일여래)’를 유일신 ‘데우스(Deus)’의 번역어로 사용했다가 불교의 밀교적 부처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혼동되는 문제를 겪었습니다. 오류를 인지한 하비에르는 혼동을 방지하기 위해 불교 용어를 폐기하고 라틴어 발음 그대로 ‘데우스(Deus)’라는 음역어를 직접 사용하도록 엄격히 시정했습니다.
하비에르가 야마구치와 분고(오이타) 등지에서 활동하며 약 2년여 동안 세례를 베푼 일본인 신자는 약 1,000~2,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그는 일본 사회가 중국의 철학과 문자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아시아 복음화의 궁극적 열쇠는 중국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1551년 말 일본을 떠나 인도 고아로 복귀한 후 중국 선교를 준비했으나, 1552년 12월 광둥성 인근의 상천도(상촨섬)에서 중국 본토 진입을 기다리던 중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3. 선교 활동의 조건과 판단 기준
하비에르가 세 지역을 거치며 채택한 사역 방식은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명확한 현실적 조건과 신학적 기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 언어 및 문자 해독력의 조건: 대상 공동체가 문자를 사용하는 지식인 중심 사회인지(일본), 구전 중심의 어촌 빈민 공동체인지(인도 어부 해안)에 따라 문서 번역 및 암송 방식을 엄격히 구분했습니다.
- 정치적 권력 구조의 성격: 포르투갈 총독의 직접 통치가 미치는 지역(인도 고아)에서는 국가 권력의 행정적 보호를 활용하면서도 식민지 관리들의 부패를 견제하는 사목을 펼쳤습니다. 반면 강력한 독립 군주들이 지배하는 지역(일본)에서는 외교적 의전과 서구 과학 문물의 매개력을 활용하여 다이묘의 신뢰를 먼저 얻는 하향식(Top-down) 접근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 종교적 세계관의 토착화 기준: 현지 문화와 관습은 최대한 존중하되, 성경의 핵심 교리(창조주 하나님, 영혼 불멸, 십자가 대속)를 훼손하는 종교적 혼합주의는 단호히 거부한다는 내적 기준을 유지했습니다. 대일여래(다이니치) 용어를 즉시 폐기하고 라틴어 음역어로 회귀한 것은 이 판단 기준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4. 하비에르 선교 사역의 단계별 실행 순서
하비에르가 새로운 선교지에 발을 디뎠을 때 반복적으로 적용한 체계적인 선교 실행 절차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관청 대신 지역 병원, 나환자 수용 시설, 감옥을 찾아가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여 주민들의 신뢰를 확보했습니다.
- 현지 사회 및 질병 취약 계층 섬김:
통역관과 협력하여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 등 신앙 생활의 뼈대가 되는 문헌을 현지 언어로 신속하게 번역했습니다.
- 현지 언어 습득 및 핵심 교리 번역:
종을 울리거나 노래를 지어 부르는 방식을 통해 어린아이들과 문맹 계층에게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반복 학습시켰습니다.
- 교리 교육과 대중 암송 지도:
지역의 영주나 통치자를 예방하여 유럽의 문화적 성과를 소개하고, 종교적 자유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 금지 약속을 서면이나 구두로 받아냈습니다.
- 지배층 접견 및 사목적 안전 확보:
지배 종교(힌두교 브라만, 불교 승려)의 지도자들과 공개적으로 만나 질문을 던지고 토론함으로써 지적 진지함을 입증했습니다.
- 지식인·종교 지도자와의 공개 토론:
자신이 떠난 후에도 공동체가 스스로 유지되도록 카테키스트(교리 교사)와 신앙 공동체 리더를 세우고 주기적인 서한 교환을 통해 조직을 관리했습니다.
- 현지인 평신도 지도자 양성 및 위임:
5. 선교 사역 분석 시 주의할 역사적 예외와 한계
하비에르의 사역을 평가할 때, 맹목적인 영웅화나 현대적 기준에 의한 일방적 비판을 피하기 위해 다음의 역사적 예외와 한계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하비에르 개인은 청빈하고 헌신적이었으나, 그의 사역은 기본적으로 포르투갈 국왕의 보호권(Padroado)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식민지 침략과 기독교 선교가 동일시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이후 아시아 국가들에서 기독교가 외세 침략의 앞잡이로 오인되는 결정적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 포르투갈 제국주의와의 필연적 결착:
하비에르가 초기에 보여준 초자연적 방언의 기적 일화는 후대 전설에서 과장된 측면이 크며,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생 심각한 언어 장벽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안지로의 통역에 의존했던 초기 일본 사역에서 발생한 ‘다이니치(대일여래)’ 오역 사건은 문화적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 발생할 수 있는 토착화의 위험성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 언어 장벽과 문화적 오해의 위험성:
16세기 유럽 가톨릭의 신학적 한계 속에서, 하비에르는 힌두교의 브라만 계급이나 불교의 승려들을 ‘악마의 사제’로 규정하는 등 비기독교 종교의 깊이 있는 영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대화하기보다는 타파해야 할 우상숭배로 인식하는 시대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인식의 한계:
독자 점검 체크리스트
핵심 역사적 사실 및 사역 요약
- [ ] 하비에르는 예수회 창립 멤버로서 포르투갈 국왕과 교황 특사의 위임을 받아 아시아로 파견되었다.
- [ ] 인도 고아와 어부 해안에서는 하층민 파라바스 족을 위해 타밀어 교리서 번역과 순회 사목을 진행했다.
- [ ] 말라카는 다문화 교역항 사목 거점이자 일본인 안지로를 만나 일본 선교를 결심한 결정적 연결지였다.
- [ ] 일본에서는 외교적 의전과 서구 문물 증정을 통해 다이묘의 허가를 얻고 승려들과 철학적 논쟁을 펼쳤다.
- [ ] 번역 오류(다이니치)를 발견한 후 라틴어 음역어 ‘데우스(Deus)’를 도입해 교리적 혼선을 차단했다.
현대 신앙적 적용 및 성찰
- [ ]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의 문화와 지적 배경을 고려한 맞춤형 소통 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 [ ] 말과 교리 설명에 앞서 환자와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사랑의 실천을 선행하고 있는가?
- [ ] 복음의 본질(유일신 신앙, 십자가와 부활)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문화적 유연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 [ ] 내가 속한 시대의 정치적·이념적 한계가 신앙의 본질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경계하고 있는가?
자주 묻는 질문 (FAQ)
Q1. 하비에르는 인도에서 종교재판(Inquisition)을 직접 주도했나요?
A. 아닙니다. 하비에르가 1546년 인도 고아에 비밀리에 유대교를 신봉하는 가짜 개종자들과 유럽인들의 도덕적 타락을 바로잡기 위해 종교재판소 설치를 교황청에 청원한 서한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고아에 정식으로 종교재판소가 설립된 것은 하비에르 사후인 1560년의 일이며, 하비에르 본인은 인도에서 재판을 주도하거나 처형을 집행한 적이 없습니다.
Q2. 하비에르가 일본에서 활동할 때 박해를 받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로 다이묘들이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오우치 요시타카나 오토모 소린 같은 다이묘들은 포르투갈 무역선이 가져오는 화약, 조총, 비단 등의 경제적·군사적 이익을 얻기 위해 선교사들의 활동을 전략적으로 허용하고 보호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에 의한 본격적인 전국적 기독교 금령과 잔혹한 박해는 하비에르 사후 수십 년 뒤인 1614년 이후에 본격화되었습니다.
Q3. 개신교 역사와 관점에서도 하비에르의 사역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나요?
A. 교리적 차이(성모 신심, 교황권 인정 등)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선교학자들 역시 하비에르의 헌신적인 선교 열정, 현지 언어로의 교리 번역 노력, 문화적 배경에 맞춘 적응주의적 접근, 그리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국경을 넘어 복음을 전한 자기희생적 태도를 높이 평가합니다. 특히 윌리엄 캐리나 허드슨 테일러 등 근대 개신교 선교의 선구자들에게도 하비에르의 생애는 큰 도전과 귀감이 되었습니다.